남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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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응지(應趾), 호는 월당(月塘). 은열공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찰방 강근(姜瑾)이다. 강인상은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었고, 지조와 절개가 굳세었다. 1576년(선조 9)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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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토목·건축 및 기타 이와 관련되는 건설 공사의 도급을 받는 영업. 건설업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각종 인공 시설물들인 토목과 주택, 상가, 공장, 사무실 등의 건축물을 건설하는 공사를 맡아 수행하는 영업으로 공사의 종류에 따라 일반건설업·특수건설업·전문건설업으로 나누기도 한다. 일반건설업 및 특수건설업을 영위하려면 건설교통부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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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과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산.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남원성의 오수정까지 올라오던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고리봉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곡성의 명산인 동악산이 북쪽으로 삿갓봉·두바리봉·문덕봉과 이어지며, 남쪽 가까이에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고리봉은 지리산을 가까이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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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고죽동 황죽마을에서 고산마을을 잇는 소로. 소로란 주 간선 도로와 보조 간선 도로 이외의 도로로서 접근 기능을 수행하는 도로를 가리킨다. 고죽동(高竹洞)은 고산(高山)마을과 황죽(黃竹)마을이 합쳐진 이름이다. 고산마을은 역사적으로 남원에 전란이 있을 때마다 피난처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될 때에도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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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에 속하는 법정동. 고산마을은 지형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굴속같이 아늑하다고 하여 고산골이라 하였다. 황죽마을은 자연생 대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는데, 무령군 유자광(柳子洸)이 태어나자 대나무가 누렇게 말라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유자광이 태어나면서 마을 정기를 다 뽑아 대나무가 누렇게 죽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후로 마을 이름을 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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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쌍교동에 있는 서당. 관서당은 문자 그대로 관(官)의 서당(書堂)이다. 관청에서 운영, 관리하는 옛날 한문서당으로 남원부 관내 농가 하층민, 혹은 하급 관리 자제들이 주로 공부하던 곳이다. 광한루 뒤편에 위치한 서당 건물로 남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당이다. 남원부에는 관서당이 성동재, 성남재, 운봉 관서당 등 세 곳이었으나 폐철되고 18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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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신정동 삼거리에서 시청로 사이에 있는 도로. 전라북도 남원시 교룡산성을 우회하여 개설된 신설 도로이며, 시청 소재지로부터 북서쪽으로 3㎞ 정도의 근거리이며,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당시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도로이다. 교룡로는 남원의 서남쪽에 있는 교룡산[520m]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곳을 발원지로 하여 도로의 명칭도 교룡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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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을 연결하여 인간과 물자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 남원시는 섬진강의 중류에 위치하는 섬진강권의 핵심 도시로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동부 지역 및 경상남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1. 삼국시대 남원은 삼한시대 때 마한과 변한의 접경 지역이었으며, 삼국시대 때는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었다. 따라서 정치적·군사적 요충지로서 주변 지역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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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숙(惺叔). 고려 때의 판서(判書)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며, 현령(縣令) 김원(金騵)의 아들이다. 김경로는 어릴 때부터 여력이 출중하고 총명하여 열심히 경전을 읽었으나, 중년에 안질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 문무의 실력을 견줄 만했던 황진(黃進)과 같이 1576년(선조 9)에 무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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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계복(金啓福)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뛰어나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장으로서 자원하여 싸움터에 나아가 많은 적을 죽였다.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군량 수백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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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시재(時哉). 밀직사 김귀갑(金貴甲)의 후손이며, 김의택(金義澤)의 아들이다. 김응배는 힘이 세고 담력이 있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사 2,000여 명을 이끌고 웅치(熊峙)의 싸움에 나아가 많은 적병을 죽였는데 그 공으로 사과(司果)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 30)의 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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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지숙(止叔), 호는 수성재(守性齋).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며, 감정(監正) 김취련(金就鍊)의 아들이다. 김정은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고, 옳지 못한 것을 보면 분함을 참지 못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였으며,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시묘를 극진히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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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김치도는 어릴 때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먹을 것을 주면 자신의 입에 넣지 않고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드렸다. 부모의 병환이 위중하자 명산과 북극성(北極星)에 기도하며 치유를 갈구하였으며, 상(喪)을 당해서는 예절을 지켜 섭섭함이 없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청도에서 창의(倡義)하여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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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의 전라북도 남원 지역의 역사. 남북국시대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와 발해가 대립하던 시기부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서기 936년까지를 의미한다. 신라가 백제를 병합(936)하면서 남원 지역은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다. 신라에서는 백제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의 하나로 685년(신문왕 5)에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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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이 유서 깊은 도자기 고장이었다. 정유재란 때 남원의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생활해야 했고, 그 곳에서 일본의 도자기 수준을 향상시켰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고향 남원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불렀으며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는 노래가 오리 노래이다. 1994년 남원문화원에서 이 역사적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오리 노래탑을 세웠다. 남원은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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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에 있는 고려 문종 때 지어진 만복사의 터. 『동국여지승람』 권지39, 남원도호부 「불우조(佛宇條)」를 보면, “기린산 아래에 있는데, 동쪽에 오층전이 있고 서쪽에 이층전이 있으며, 전 내에는 동불이 있는데, 길이가 35척(약 10.6m)이다. 고려 문종 때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숙종 때에 간행된 『용성지(龍城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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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정유재란 중에 전라북도 남원성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왜군과 싸운 전투. 임진왜란에 이어 왜군이 재차 침략한 정유재란으로 인해 조선은 다시 한번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조선에서는 정유재란에서 일본의 침략 목표 지역을 전라도와 충청도라고 여겨, 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최전방의 보루로서 남원성을 지목하였다. 남원성은 조선의 조정에서는 물론 명나라에서까지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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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의 남동부에 위치한 시. 동남쪽은 지리산을 경계로 경상남도 하동군, 동쪽은 경상남도 함양군, 서쪽은 전라북도 순창군, 남쪽은 전라남도 구례군과 곡성군, 북쪽은 전라북도 임실군과 장수군에 접한다. 인구는 2009년 말 현재 88,496명, 행정구역은 23개 읍·면·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5년 1월 1일 남원군과 남원시가 통합되었다. 삼국시대 백제 때에는 고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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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신정동에 있는 전라선 철도역.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에 있던 구 남원역사는 부지가 4만 여 평이었고, 보선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과거에는 철도역이 없는 순창, 장수 지역은 물론이고 경상도 함양이나 거창에서도 남원역을 이용했던 탓에 남원역은 남원 지역과 인근의 경제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도로 교통망이 발달하게 되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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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옮겨갔지만 70여 년 동안 남원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가장 중요한 교통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남원역의 뒤에는 조그만 철책 안에 ‘만인의총유지(萬人義塚遺址)’라는 조그만 돌 표지석이 서 있다. 이 자리에서 동쪽으로 100m 거리에는 남원성 북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 남원역의 구내이다. 만인의총 유지 바로 뒤쪽에서부터 남원성 북문 자리로는 남원성의 북쪽 성벽이 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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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조선시대 남원도호부 내의 남원 유생들을 위한 국립 중등 교육 기관. 남원향교는 조선시대 숭유정책에 따라 전국 모든 행정 구역에 설립된 교육 기관 중의 하나로, 공자를 비롯한 4성(四聖 :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송나라 때의 6현(六賢 :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대 18현인에게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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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쌍교동과 죽항동을 잇는 골목길. 골목길이란 차량 통행이 곤란한 지역으로 좁은 길, 또는 사람 통행 위주의 기능을 수행하는 도로를 가리킨다. 널벙바위에는 옛날 어떤 힘센 장수가 바위를 번쩍 짊어져 남원성(南原城) 동문 앞에 판 해자(垓字)에 돌다리로 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재 널벙바위는 광한루원(廣寒樓苑)으로 옮겨져 있으며 널렁바우(넓은바위)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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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사람이나 차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비교적 큰 길. 전라북도 남원 지역의 도로망 형태는 지형적인 요인으로 남북 축으로 이루어져 있어, 횡축 방향의 교통체계는 미흡한 편이다. 하지만 현재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광양만의 동북아 대형 중추항만 발전계획으로 중요성이 커지는 광양~남원~전주 간 고속국도가 건설 중에 있다. 또한 광주~남원~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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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죽항동에 있는 옛 남원성(南原城)의 동문(東門)이 있던 곳에 위치해 있는 교차로. 사거리란 도로와 도로가 서로 엇갈린 교차로 중에서 십자형으로 갈린 교차로 유형을 말한다. 남원성은 신라 신문왕(神文王)[?~692] 때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1597년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다시 크게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남원성 안에는 남북과 동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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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하는 법정동이자 행정동. 동충동은 본래 남원의 서봉면(棲鳳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동촌(東村)·창동(倉洞)·양동(楊洞)과 통한면의 충촌(忠村)을 병합하여 동촌과 충촌에서 첫 자를 따 동충리라 하였다. 1930년 남원읍에 편입되어 동부 동충리, 서부 동충리, 북부 동충리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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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에 있는 수령 235년의 팽나무. 높이 17m, 흉고둘레 3.30m, 근원둘레 4m, 수관폭 20m, 지하고 2.5m이다. 지상 2.5m 정도에서 큰 가지가 사방으로 고루 퍼졌으며 매우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235년 정도로 추정된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 방어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남원성 터에 자라고 있던 자생목을 보호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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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중율(仲律).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의 후손이고, 진사(進士) 문치주(文致周)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문형(文炯)이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의 중군(中軍)이 되어 남원성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순절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사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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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상상의 힘을 빌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와 문자로 표현한 예술, 또는 작품. 남원 문학의 대상 범위는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에서 문학 활동을 했던 작가들과 남원에서 출생한 뒤 타지에 가서 활동한 작가, 그리고 남원 지역의 문학 활동에 참여하여 남원 문학 발전에 기여한 작가들과 작품들이다. 남원 문학 대상의 조건은 첫째, 중앙 문단에 등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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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성(密城). 호는 백헌(栢軒). 증조부는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 조부는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박이(朴頤), 부는 박경(朴慶)이다. 박기화는 성품이 굳세고 절개가 꿋꿋하였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학식이 깊었다. 농암(聾庵) 이현보(李賢輔)와 교제하였다. 정유재란을 당하여 남원성이 위험에 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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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성빈(聖彬), 호는 지은당(智隱堂). 정유재란 때 순절한 박계성(朴繼成)의 후손이며, 박사현(朴思賢)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박시채는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동 수십 명을 거느리고 사재를 털어 군량을 마련하여 남원성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같은 고을의 의사 7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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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남원 출신의 임진왜란 의병장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참판(參判)을 지낸 수정(水亭) 변처후( 邊處厚)의 5세손이며, 생원(生員) 변호(邊灝)의 아들로 1529년(중종 24)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남원의 운봉(雲峰) 도탄(桃灘)에 살았으므로 도탄선생이라 칭하였다.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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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하정동에 있는 사거리. 남원성은 사방에 문을 가진 평지의 읍성으로서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다. 사대문루는 남원성을 재축할 때 중건되었다. 그 뒤 동학농민전쟁 때 동문과 남문이 소실되고 일제가 시가지를 정리할 때 서문과 북문이 헐리었다. 현재는 북벽 일부만 남아 사적 제29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서문사거리는 옛 남원성의 서문이 있었던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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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송파(松坡). 시조 병부공 양능양(梁能讓)의 13세손이며 아버지는 증우찬성(贈右贊成) 양구주(梁九疇)이다. 양성지[1415~1482]는 1441년(세종 23)에 생진문과(生進文科)에 합격하여 경창부승(慶昌府丞)과 성균전적(成均典績)을 역임하였다. 훈구파(勳舊派) 중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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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열녀. 아버지는 고려시대 문과급제자 이이시(李以時)이고, 남편은 직제학 양수생(楊首生)이다. 이씨가 임신한 뒤에 곧바로 남편이 죽자 친정 부모는 개가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씨는 “나라의 풍속이 모두 그러한데 어찌 저 혼자만 어길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양씨(楊氏)의 핏덩이가 배 속에 있으니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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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문찬(文贊), 호는 칙헌(則軒).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오위장을 지낸 양맹석(梁孟錫)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윤종길(尹宗吉)의 딸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장정 300여 명을 모아 이끌고 서울로 가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남원부사 심의두(沈宜斗)가 저지하여 수행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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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의 선사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남원의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된 바 없다. 삼한 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지리산을 경계로 진한과 변한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와 관련해 마한이 달궁(達宮) 지방에 별궁을 두고 정장군(鄭將軍)과 황장군(黃將軍)을 파견해 진한·변한의 침략을 막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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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재, 호는 송종. 판서에 증직된 오응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오탄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반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장정 수십 명을 거느리고 최여삼·태윤주 등과 함께 남원성을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유서를 남기기를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반란군을 진압할 것이니 뒷일을 부탁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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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현(仲顯), 호는 설강(雪岡). 고조부는 이조참판 오극제(吳克悌)이며, 할아버지는 참봉 오몽인(吳夢仁)이며, 아버지는 참봉 오기복(吳麒福)이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형 오흥업과 함께 참여하였다. 왜적에 의해 남원성이 겹겹이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아버지 오기복의 허락을 받아 수십 명의 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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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술(子述). 금남재 오응(吳凝)의 5세손이며, 영의정 오찬조(吳纘祖)의 아우이다. 무술에 뛰어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정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왜적이 남원성을 포위하자 형인 오찬조를 따라서 숙성령으로 나아가 적병의 동정을 살피고 적병 수십 명을 베었다. 승세를 몰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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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서 활약한 무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중(文仲), 호는 완원당(翫元堂). 현감 오하몽(吳下蒙)의 아들이다. 1574년(선조 7) 무과에 급제한 후 비변랑, 사헌부감찰, 형조정랑을 거쳐 1579년 군기시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83년 이이(李珥)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동인들의 미움을 사 흥덕현감으로 좌천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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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함양. 자는 중술(仲述), 호는 영회정. 금남재 오응의 5세손이다. 무술이 뛰어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동관을 굳게 지켰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군이 남원성을 포위했을 때, 그는 남원중군으로 숙성령의 싸움에서 많은 적병을 참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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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현(伯顯). 할아버지는 참봉 오몽인(吳夢仁)이고 아버지는 참봉 오기복(吳麒福)이다. 어머니는 금산김씨(錦山金氏)로 김성원(金聲遠)의 딸이다.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성 안에서 군량 보급을 맡으며 접반사 정기원 등과 힘을 합하여 성을 지켰다. 틈을 내어 집으로 돌아가서 늙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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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하는 법정동이자 행정동.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돌아가는 길에 남원성(南原城)에 들렀다가 잠시 마을 앞 축천(丑川) 강변에서 쉬어 간 일이 있었다. 훗날 이성계 장군이 조선왕조를 창건하여 왕위에 오르니, 사람들은 이 마을 이름을 왕묘(王廟)와 강정(江亭)에서 이름을 따 왕정(王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6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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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의 별호(別號). ‘용성’이 남원의 별호라고 처음 지칭한 것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서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남원을 가리키는 말로 용성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고려사』에 나오는 용성의 사용례를 찾아보면 대부분 수주(水州)[수원]의 속현이나 안변도호부에 속한 등주(登州)의 속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남원을 가리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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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용성관(龍城館)에 있는 석조물. 용성관 석물은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용성관은 통일 신라 때인 691년(신문왕 11)에 건립되어 조선 시대에는 관원들의 숙소인 객사로 사용되었으며, 그 규모가 웅대하였다. 한때는 조선 태조의 전패(殿牌: 전(殿)자를 새긴 나무패로 왕의 상징)를 모셔 ‘휼민관(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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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객사 터. 용성관은 조선시대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된 건축물이다. 그 규모가 웅장하여 남원에서는 광한루, 관왕묘와 더불어 고대 건물의 삼걸(三傑)로 불렀다. 이후 불에 타서 여러 차례 보수 과정을 거쳤다. 용성관을 처음 건립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인 691년(신문왕 11)인데, 용성관을 휼민관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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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하는 법정동. 용정동의 유래는 마을 안에 용정(龍井)이라는 샘이 있는데, 이 샘에 용이 살았다고 하여 이름이 지어졌다. 용정은 여름철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수질이 좋기로 유명하였다. 용정동은 1897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전라북도 남원군 서봉면 옹정리로 재편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원군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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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 운봉현 관아에서 설립한 공립 초등 교육 기관. 운봉관서당은 조선 후기인 1875년 남원부청의 발기로 관내의 하급 관원들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운봉관서당은 다른 서당과 마찬가지로 『사자소학』과 사서삼경 및 『명심보감』 등 유학을 주로 가르쳤다. 운봉관서당은 1875년(고종 12) 남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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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역사적·예술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재 가운데 일정한 형태를 지닌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 1995년 현행 문화재 보호법에 따르면 문화재는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로 분류된다. 유형문화재는 건조물·전적(典籍)·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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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하정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 설립한 공립 초등 교육 기관의 터. 읍성내관서당은 1830년(순조 30)에 남원부청의 발기로 관내의 하급 관원들의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다. 남원성(南原城) 안 동쪽에 위치하였다 해서 일명 ‘성동재(城東齋)’라 하였다. 다른 서당과 마찬가지로 주로 『사자소학』과 사서삼경 및 『명심보감』 등의 유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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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쌍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설립된 공립 초등 교육 기관. 읍성외관서당은 조선 후기인 1875년 남원부청의 발기로 관내의 하급 관원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다. 남원성 남쪽에 위치한 서당이라는 뜻에서 일명 ‘성남재(城南齋)’로 불리다가 ‘남성재(南城齋)’로 개칭하였다. 일반 다른 서당처럼 『사자소학』과 사서삼경 및 『명심보감』 등의 유학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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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통시대에 외적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나선 민간인. 의병이란 순수한 민간인 신분으로, 국가의 운명이 위급할 때에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가리지 않고 의를 위하여 과감하게 일어선 의용병이다. 의병의 전통은 삼국시대에 비롯되었으며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한말에 이르고 있다. 특히 한말 의병은 항일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남원 출신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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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술(景述), 호는 금헌(禁軒), 또는 만휴당(晩休堂).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승지 이혼(李渾)이다. 지금의 임실군 둔남면 둔덕에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5년(선조 1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랑으로 있었으나 명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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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무신. 본관은 용인(龍仁). 충청남도 천원군 직산면 삼동리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1597년(선조 30)에 남원부판관이 되었다. 부임하자마자 정유재란으로 왜군의 재침이 더욱 성하자, 관청에 비축해 둔 재물을 처분하여 소와 술을 사서 모든 장졸들을 배부르게 먹인 다음 남원성을 사수할 계책을 세웠다. 그해 8월 12일경 남원성이 11만여 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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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수부. 조선의 개국공신 이의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병서를 익힌 뒤에 일평생 몸을 조국에 바쳐 순국하기를 스스로 기약하고 매일 장순(張巡)과 악비(岳飛), 문천상(文天祥)의 전기를 읽었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선조 25)에 나주판관이 되고, 이듬해 전라방어사·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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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 이유번(李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석명(李碩明)이고,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이희선(李喜善)이다. 1583년(선조 16)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5년(선조 1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좌랑으로 선조를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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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명나라 장수. 어려서부터 군에 종사하던 역전의 용사로서 곤봉의 명수였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중군으로 남원성 동문을 지키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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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임규는 자질이 특출했으며, 벼슬이 사용(司勇)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부사 임현의 막하에서 함께 싸우다가 남원성이 무너질 때 순절하였으나, 시신을 찾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남원성 싸움에서 순절한 임규에게 초혼장(招魂葬)으로 장사를 지냈고, 정려(旌閭)를 내려 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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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응성(應聖)이고, 익혜공 정난종(鄭蘭宗)의 후예이며, 참봉 정대훈(鄭大勳)의 아들이다. 정기수는 힘이 세고 기개가 있었으며, 1574년(선조 7)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정에 이르렀다. 그는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 때 그의 6촌 아우인 정지심·정지우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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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중(士重), 호는 현산(見山). 고려시대의 좌복야 정목(鄭穆)의 후손이며, 부사 정광보(鄭光輔)의 고손자, 현령 정한용(鄭漢龍)의 증손자, 사직서령 정순복(鄭純福)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내산부원군 정상신(鄭象信),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영천부정 이경(李璟)의 딸이다. 정기원은 24세가 되던 해 진사에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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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인이자 의병장. 본관은 한양.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 우의정 양경공 조연(趙涓)의 후손이며, 사직 조벽(趙璧)의 아들이다. 조경남은 일찍 부모를 잃고 외조모에게서 자랐다. 효성이 지극해 6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색동옷을 사양하고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는 미음만 먹으며 3년을 지냈다. 15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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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하는 법정동. 천거동은 본래 개천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냇거말이라 했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천거(川渠)가 되었다. 일설에는 옛날 남원성(南原城) 내의 하수구가 요천 쪽으로 많았으며, 요천을 이용하여 조산 쪽 들로 향하는 농수로 등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내[川]의 도랑[渠]을 뜻해 천거(川渠)라 했다고도 한다. 본래 남원의 장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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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동 마을에서 유명한 곳으로는 무엇보다도 남원향교를 들 수 있다. 향교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만 봐도 그렇다. 원래 향교가 있던 마을의 이름이 교동 등으로도 불리어지나 남원의 향교동은 직접 향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 호남 지역에는 4대 향교가 있었는데 남원향교를 비롯하여 전주향교, 광주향교, 나주향교가 그것이다. 남원향교는 조선 시대 전체를 통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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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화순(和順). 호는 택암(澤巖), 고려 충신 최영유(崔永濡)의 9세손이다. 최여근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그의 사촌 형인 양지당(養祉堂) 최여운(崔汝雲)과 함께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서는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병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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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여앙(汝仰), 호는 양지당(養祉堂). 문충공(文忠公) 최선문(崔善門)의 후손이며, 지평(持平) 매헌(梅軒) 최달승(崔達昇)의 손자이다. 최여운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또한 힘이 세었다. 부모의 상을 당할 때마다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의 족형(族兄)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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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소하천. 축천에는 축천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그 주변에는 쇠붙이로 된 황소 한 마리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를 철우(鐵牛)라 하였다. 그 위치는 지금의 향교동 남원고등학교 인근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동서남북 24방위 중 정북(正北)과 정동(正東) 사이 즉, 북동쪽을 오행상으로 간방(艮方)이라 한다. 남원읍의 간방에는 만행산(萬行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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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사당. 충렬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하여 접반사 정기원, 남원부사 임현, 조방장 김경노 4충신을 봉안하고 제사드릴 목적으로 1612년에 설립되었다. 곧이어 별장 신호, 통판 이덕회, 구례현감 이원춘 3충신이 추가 봉안되어 7충신의 위패를 봉안하며 제사드리는 사당으로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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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협계(峽溪). 자는 여인(汝仁), 호는 정기제(正己齊).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수문장(守門將) 태윤민(太潤民)의 아들이다. 태귀생은 활과 말을 잘 다루었으며 계략이 담대하였다. 1555년(명종 10)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주부(注簿)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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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협계(峽溪). 자는 선충(善忠), 호는 매계(梅溪).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좌랑(佐郞) 태은정(太殷鼎)의 아들이다. 태우는 일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큰아버지인 주부(注簿) 태귀생(太貴生)을 따라서 아들 태시경(太時慶)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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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협계(陜溪).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수문장(守門將) 태윤민(太潤民)의 아들이다. 태천생은 어려서부터 궁마(弓馬)를 좋아했으며 재지(才智)가 뛰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태귀생(太貴生)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을 지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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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하는 법정동. 남원시의 상가, 은행, 공공기관, 각종 단체 등이 밀집된 중심동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통동 신흥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인구가 이동하여, 하정동은 구 도심 지역이 되어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 야간에는 인구 이동이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관청인 동헌의 샘 밑의 마을이라 하여 명칭이 생겨났다. 하정동은 남원성이 건재할 때까지 성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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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동에 위치한 주요 문화재로는 만인의총(사적 272호)을 비롯하여 남원향교(지방유형문화재 49호), 남원향교 대성전(지방유형문화재 8호), 경주 김씨 보판각(지방유형문화재 161호), 교룡산성(지방기념물 9호) 그리고 남원 사직단(지방기념물 79호) 등이 있다. 교룡산성 안에는 685년에 창건한 선국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에는 대북(민속자료 5호), 대웅전(지방유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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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대옥(大玉). 판서(判書) 형규(邢珪)의 후손이며, 진사(進士) 형우안(邢友顔)의 증손이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남원성이 포위당하자 입고 있던 비단옷에 “죽어도 난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 된 직분(死不避亂 臣子職分)”이라는 여덟 글자와 이름을 혈서로 쓴 뒤 성으로 달려갔다. 남원부사 임현(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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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여원(汝願). 세종 때 재상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증직(贈職)된 황경구(黃慶龜)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형 황함(黃諴)과 조카 황익계(黃翼繼), 동지 장우정(張于井)·최여대(崔輿垈) 및 의사 70여 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을 지켰다. 17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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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정숙(正叔). 양정공(良靖公) 황사효(黃事孝)의 증손이다. 황대중은 효성이 지극하여 효건(孝蹇)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참봉(參奉)에 천거되었다. 임진왜란 때 장사(壯士)로 뽑혀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병사(兵使) 황진(黃進)을 따라 진주성 싸움에도 참가하였다. 성이 함락되면서 겨우 빠져나온 그는 통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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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사술(士述).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황함(黃諴)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숙부 황대(黃戴)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집안의 노비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달려가 여러 의사들과 함께 동문과 북문을 지켰다. 고종 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追贈)되었고, 충신의 정려(旌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