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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934
한자 李尙吉
영어음역 Yi Sanggil
이칭/별칭 사우,동천,충숙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윤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남원시
성별
생년 1556년연표보기
몰년 1637년연표보기
본관 벽진
대표관직 공조판서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 이유번(李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석명(李碩明)이고,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이희선(李喜善)이다.

[활동사항]

1583년(선조 16)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5년(선조 1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좌랑으로 선조를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렀다. 적의 기세가 더욱 치열하여 계속 서행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이상길은 함경도로 옮기자고 주장하였다.

선조가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중전을 호종하고 먼저 북로로 나아가게 하였는데, 이는 그가 관동의 형편에 밝았기 때문이다. 이때 강원감사가 그를 종사관으로 임명하고 모병과 보급의 책임을 주었다.

1597년(선조 30)에 정랑으로 있다가 익산군수로 나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당시 싸움이 한창 치열하여 병력과 군량이 제대로 보충되지 않아 빠져나간 사람이 있었으나 그가 이끄는 부대만은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간 사람이 없었다. 명장 유정과 병사 이복남 등이 이에 탄복하고 포상하였다.

1602년에 앞서 정언으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 등을 정여립(鄭汝立) 일당으로 몰아 추론한 죄로, 성혼(成渾) 등과 함께 6년간 황해도 풍천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1608년 유배에서 풀려 나온 뒤 강원도 회양부사, 평안도 안주목사, 호조참의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전라도 남원으로 돌아가 은퇴하였다.

1624년(인조 2)의 이괄의 난 때에는 평안감사로 있다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 병졸을 이끌고 반군을 치러 가서, 이괄의 처자의 머리를 베어 반군의 앞길에 매달았다. 이때의 공으로 뒤에 가의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72세의 고령에도 인조가 강화도로 옮기게 되자 명을 받들어 군량 수천 석을 수로로 보낸 후에 용천을 지켰다. 그때에 적병이 직접 부성을 침입해 오자 그는 선비를 모아서 죽을 각오로 싸울 계책을 세웠으나 적병이 물러났다.

그는 바로 군사를 거느리고 적병을 추격하여 적의 군수품을 모조리 빼앗았다. 명의 모문룡이 글을 보내어 이를 칭찬하였고, 인조로부터 치하를 들었다. 1628년(인조 6)에는 왕명을 받들어 모문룡의 군영에서의 일을 마치고 들어오니 인조가 말 한 필을 내렸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조판서로서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갔으나 다음해에 강화도가 끝내 적에게 무너졌다. 아들 이경(李坰)이 후퇴할 것을 청하자, 종묘와 사직이 장차 망하려 하는데 어찌 구차하게 살 수 있겠느냐면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81세였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 좌의정의 증직과 충숙이란 시호를 내렸다. 뒤에 정려를 내리고 강화도에 충열사를 세워서 문충공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제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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