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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 초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867
한자 李尙吉肖像
영어음역 Yi Sanggil Chosang
영어의미역 Portrait of Yi Sanggil
이칭/별칭 이상길 영정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8월 31일연표보기 - 이상길 초상 보물 제792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이상길 초상 보물 재지정
성격 유물|초상화
제작시기/일시 조선 중기
소장처 국립전주박물관
소장처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2가 900
소유자 이정봉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정의]

조선 중기 문신 이상길을 그린 초상화.

[개설]

이상길은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자(字)는 사우(士祐), 호(號)는 동천(東川)이다. 1556년(명종 11)에 출생하였는데,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한 뒤 평안감사,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사헌부 정언(正言)을 거쳐 1599년(선조 32)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이때 선정의 실적이 높게 평가되어 통정대부로 특진되었다.

정여립(鄭汝立) 사건이 일어났을 때 최영경(崔永慶)을 탄핵했는데, 최영경 관련설이 사실 무근으로 판명되자 책임을 지기 위하여 벼슬을 내놓았고, 1602년(선조 35)에 풍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유배 생활이 풀려 다시 회양부사(淮陽府使)를 거쳐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1617년(광해군 9) 다시 등용되어 동지사(冬至使)로 뽑혀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광해군의 폭정이 지속되자 난세를 개탄한 나머지 스스로 벼슬을 사직하고 오로지 독서에 전념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청군(淸軍)이 강화에 육박하자 자결(自決)했다.

[형태 및 구성]

이상길 초상은 낮은 사모(紗帽)에 담홍색(淡紅色) 단령(團領)을 입고 공수 자세(拱手姿勢)를 취하고 있으며, 의자에 앉은 좌안 7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상(全身像)이다. 상용 형식 면에서 단령의 양쪽 트임새로 살짝 내비치는 첩리(帖裏), 양쪽 어깨의 경사진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앉음새를 매우 안정되게 나타내어 조선 중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특색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면의 세부 묘사는 이미 골상학(骨相學)에서 말하는 삼양(三陽), 삼음(三陰), 누당(淚堂), 와잠(臥蠶)을 경계로 하여 선염기(渲染氣)를 짙게 안배함으로써 안면의 고심세(高深勢)를 나타내려는 도식화된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이는 이상길 재세시(在世時)의 묘법보다는 좀 더 후기의 초상화법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상길 초상은 원본을 충실히 그려낸 이모본(移模本)으로서, 안면 처리에만 이모시(移模時)의 시대색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이상길 초상은 가로 93㎝, 세로 185㎝ 크기의 면적 1폭(幅)이고, 의자에 앉은 모습을 그렸다. 머리에는 낮은 사모를 쓰고 붉은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아 보이지 않는다.

옷의 옆트임 안쪽으로 보이는 속옷과 양쪽 어깨의 기울기를 달리해 안정되어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조선 중기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나 얼굴 윤곽선의 농도를 다르게 하여 표현하는 방법은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수법으로 후대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모본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원본을 따라 충실하게 그렸고, 필체가 섬세하며 보관 상태도 양호하여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984년 8월 31일 보물 제79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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