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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2573
영어음역 Maninuichonggwa Jeongyujaeran
영어의미역 Manin Cemetery of Righteous Fighters and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7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병옥

[남원역의 수수께끼]

지금은 옮겨갔지만 70여 년 동안 남원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가장 중요한 교통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남원역의 뒤에는 조그만 철책 안에 ‘만인의총유지(萬人義塚遺址)’라는 조그만 돌 표지석이 서 있다. 이 자리에서 동쪽으로 100m 거리에는 남원성 북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 남원역의 구내이다.

만인의총 유지 바로 뒤쪽에서부터 남원성 북문 자리로는 남원성의 북쪽 성벽이 가로 지르고 있었다. 1597년(선조 30) 남원성 전투 때 남원성 북문을 지키고 있었던 장수는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었고 남원성을 지키던 우리 군사들은 거의 모두가 북문을 지키다 순절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이 자리에 남원역을 만들었고 셀 수 없이 많은 후손들이 남원역을 이용하면서 이 일대를 밟고 다녔으며 하루에도 수십, 수백의 열차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굉음을 내며 이 자리를 왕래하였다. 정유년 남원성 전투 때 이 자리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일제는 왜 이 자리에 역(驛)을 만들었는지를 추적해 본다.

[임진왜란은 남원성 비극의 단초]

일본은 임진왜란이 패전으로 끝난 이유를 분석하여 재침(再侵)을 위한 기본 자료를 삼고자 하였다. 분석 결과 두 번째 요인으로 ‘곡창 호남 지방을 장악하지 못한 것’을 들었다. 호남을 장악하지 못하여 군수품, 그 중에서도 현지에서 군량(軍糧)을 조달하지 못해 병사들이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고, 인구가 많은 호남 지방에서 의병을 양산하여 임진왜란의 중요 패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가장 많은 의병을 양산해낸 고장은 전라도였으며 그 중에서도 남원 지방의 의병이 가장 많았다. 일본의 이러한 분석에는 재침할 경우 호남 지방을 집중 공략할 것임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호남의 어떤 지방을 공격하여 호남을 장악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당시 남원은 영남·호남의 관문이었으며 한반도 남부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십자로의 중심 요지였다. 당연히 호남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원성 공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임진왜란에서의 일본 패전은 이후의 남원성 공격을 예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병력과 진로]

호남을 석권하기 위한 일본의 남원성 침공 전략은 엄청나고도 치밀했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1만 2천 8백 명,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가 1만 4천 9백 명,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1만 5천 9백 명,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2천 5백 명,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1만 명 등 5만 6천의 대병력이 동원되었다.

일본 좌군(左軍)의 주력은 7월 28일 부산포를 떠나 8월 4일 사천에 모여 8월 5일에는 하동까지 진출하였다. 8월 11일 하동을 출발한 좌군 주력은 구례에서 남원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8월 13일부터는 좌우 양종대로 나누어 좌종대는 율치(栗峙)[일명 앞밤재]를 넘어 남원성 서남면을 공격하기로 하였고. 우종대는 숙성령(宿星嶺)을 넘어 원천(源川)[현 주천면 소재지 마을]에 진출, 남원성 동북면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조선군은 청야전술(淸野戰術)을 쓰기로 결정하여 적의 진로로 보이는 모든 지방에서 군사는 물론 주민들까지 모두 철수시켰다. 이에 일본군을 칼 한 번 뽑아보지 않고 화살 하나 날려보지 않은 상태로 율치와 숙성령을 넘을 수 있었다.

[남원성 전투 이전의 남원성]

남원에는 약 2㎞ 거리를 두고 평지성이면서 읍성인 남원성(南原城)과 천혜의 요새를 이용한 산성인 교룡산성(蛟龍山城)이 있다. 평상시에는 읍성인 남원성에서 일하고 업무를 보다가 전시가 되면 금성탕지의 요새인 교룡산성에서 적을 맞아 싸운다는 원리로 축성된 고구려식 형태의 성곽 구조이다.

임진왜란이 소강 상태로 들어가자 일본의 남원성 공격을 예상한 조정에서는 1596년(선조 29)에 승병장 처영에게 명하여 의승군과 남원 부민이 힘을 합하여 교룡산성 수축 작업을 완료하도록 하였다. 1597년(선조 30) 1월에는 운봉·장수·진안·임실·구례·곡성 등 6개 현은 물론 남원부의 쌀 등 양곡을 교룡산성에 집결시켰고 주민들도 산성 안에서 생활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런데 도원수 권율은 당년 2월에 남원성의 쌍총통 1,000자루를 대구로 보내는 실수를 범하였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의 남원 진출이었다. 5월 21일 한양을 출발한 양원은 3천 명 남짓한 군대를 이끌고 6월 13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양원이 이끈 병사들은 단검을 가지고 있을 뿐 화살통을 가진 병사는 천 명 중 백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몽둥이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남원성에 도착하여 내린 첫 조치는 교룡산성을 버리고 남원성에서 적을 맞아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접반사 정기원, 남원부사 임현 등이 아무리 그 위험성을 강조하고 합리적인 전략을 제시해도 기병 전술로 싸워 온 양원은 막무가내였다.

그러면서 11자이던 성 높이를 13자로 높이고 여장을 2~3자 정도 높이면서 1,700여 명을 동원하여 깊이 두 길 정도의 해자(垓字: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만들고 성 밖에 양마장을 만들었다. 7월 11일에는 그간 애써 증·개축해 놓은 교룡산성을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파괴하여 버렸다.

8월 7일 왜군 선발대가 구례에 들어와 노략질, 살인, 방화를 자행하고 있을 때, 양원은 접반사 정기원, 남원부사 임현 등을 대동하고 숙성령에서 군사를 사열하는 허풍을 떨고 있었다. 8월 8일 현재 남원성의 병력은 성 위에 800명, 토장 안에 1,200명, 유군 1,0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후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전라병사 이복남이 50여 명을 인솔하고 입성하였다. 의병들을 포함해 조선군은 1,000여 명, 명군은 3,300여 명으로 도합 4,200명 내지 4,300명 정도였다. 이 외에 주민과 관리를 포함하여 1만여 명이 남원성에 있었다. 성 밖의 민가들은 왜군이 방어용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 철거해 버린 상태였다.

당시 구례군 북부가 남원부에 속해 있었는데, 왜군 선발대는 8월 11일에 이미 숙성령을 넘었고 야간에는 남원성 밑에까지 와서 정찰을 하고 갔다. 8월 12일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주력군이 원천 평원에 주둔하고 선봉은 요천 강변에 진출해 있었으며 남원의 동남쪽 40~50리 사이에는 화염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완전히 포위당한 남원성]

8월 13일 왜군은 남원성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율치를 넘은 왜군의 좌종대는 칠장→덕음봉→율장→대모천→서문 밖으로, 숙성령을 넘은 왜군의 우종대는 방천→선원사→향교 앞→장성교를 거쳐 서문까지를 포위해 버렸던 것이다.

남원성 주변의 산에는 왜장들의 지휘소가 만들어져 성 안을 굽어보고 있었고, 왜군 군사들은 성 밖에서 함성을 지르며 조총으로 사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군사를 보내 양원을 만나자고 하였다. 왜장의 서신을 가지고 온 것인데 약전서(約戰書)였다. 본격적으로 싸우자는 것이었다.

8월 14일 왜군의 후속 병력이 도착해 합류하였고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시작하였다. 큰 나무를 베어다가 사다리를 만들고 부서진 집에서 판자를 떼어내 방책을 만드는가 하면, 벼를 베어다 흙을 섞어 호를 메우고 높은 성채를 만들어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게 하고, 담장에 구멍을 뚫어 몸을 보호하며 총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심지어는 서문 밖의 만복사에서 사천왕상을 뜯어내 전차에 싣고 성 밖을 돌면서 시위하기도 하였다.

“약하게 보일수록 불리하다. 출격하여 싸우자.”고 하는 양원을 중군 이신방이 말렸으나, 양원은 1천여 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진출하였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많은 희생자만 내고 쫓겨 들어왔다. 당시 전주에는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이 2천 명 군사로 남원성을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우충은 양원의 지원 요청을 거부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남원성이 무너지고 왜군이 진격해 올라가자 진우충은 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 왜군은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당시 연락·지원 체계는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의 명으로 ‘남원은 전주에, 전주는 공주에, 공주는 한성(漢城)에 고(告)하라. 그리하여 서로 먼저 구언토록 하라.’ 고 되어 있었지만 명나라 장수들이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8월 15일은 남원성 전투 3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양원은 광암봉 위에 설치된 왜장의 막사에 군사(軍使)를 보내 회담하게 했는데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저녁에는 왜군 군사가 용성관에 설치된 양원의 본부에 찾아와 ‘성을 급히 비워 달라’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통보를 전했으나 양원은 거절하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을 틈타 왜군은 총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남원성을 함락시키는 못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 밤을 이용하여 호를 평탄하게 메우고 흙과 돌을 성 높이보다 높게 쌓아 올려 성을 굽어보면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휘황한 달빛 아래 북문에서의 최후의 전투]

8월 16일 왜군은 향교산에 진지를 구축하여 전주성에서 올 수도 있는 구원병에 대비하고 운제(雲梯)와 삼층 목책 위에서 성 안을 굽어보면서 총과 포의 공격을 종일토록 퍼부었다.

밤의 달빛이 휘황하게 밝아 낮과 같은 전법으로 성 안을 공격하였다. 밤이 깊어 왜군은 직접 성벽을 기어오르며 공격하였는데, 드디어 천총 장표가 지키고 있던 남문이 무너지고 이어 중군 이신방이 지키던 동문까지 무너지자 성 안의 민·군·관은 북문과 서문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양원은 잠을 자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연락 장교의 옷과 신을 얻어 신고 서문으로 갔다. 왜군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어 탈출하려는 명군이 죽어가고 있었다. 양원은 접반사 정기원과 함께 탈출하려 하였으나 정기원이 말을 탈 줄 몰라 따라오지 못하자 단기(單騎)로 서문으로 나와 탈출을 시도하였다. 양원은 탈출에 성공하여 명나라까지 갔으나 명 조정에서는 그를 사형시켰다.

그러나 그 외의 명나라 장수들은 남원성에 끝까지 남아 싸웠다. 양원은 북문을 지키고 있던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함께 탈출할 것을 종용했으나 이복남남원성과 존망(存亡)을 함께 할 것임을 맹세하며 거절하였다. 이복남은 남원부사 임현(任鉉), 교룡산성 별장 신호(申浩),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 등과 함께 북문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남원성의 남문·동문·서문이 모두 무너지고 남원성민은 모두 북문으로 몰려있는 상태였다.

별장 신호는 입었던 옷과 뽑아 두었던 이빨을 가복에게 내주며 “가족들에게 나의 순의(殉義)를 알려라.”하고는 적진으로 뛰어들어 순국하였다. 남원부사 임현과 판관 이덕회(李德恢)는 왜군 노장을 만나 차마 죽일 수 없어 돌을 던져 쫓았으나 굴하지 않고 다시 덤비자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다.

구례현감 이원춘은 활을 쏘아 적을 물리치고 있었는데 어린 적병을 차마 쏠 수가 없었다. 그 어린 적병이 전라병사 이복남을 향해 달려들자 이복남의 친병이 곤봉으로 머리를 쳐서 죽였다. 14세의 어린 소년이어서 이복남은 방패로 그의 얼굴을 덮어주게 하였다.

구례현감 이원춘에게는 특별한 소년이 있었다. 이원춘이 석주관 전투를 포기하고 남원성을 향하고 있을 때 다른 병사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끝까지 이원춘을 따라 남원성에 들어온 손공생(孫公生)이었다. 그는 ‘피하여 목숨을 보존하라.’는 구례현감의 권유를 뿌리치고 끝내 구례현감과 함께 남원성에서 순절하였다.

방어사 오응정은 큰아들 오욱(吳稶)이 탈출하여 재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까지 남원성을 지키다가 큰아들 오욱과 둘째아들 오동량(吳東亮)과 함께 순국하였다. 김폭(金幅)이라는 의병장은 싸우다 죽으면 자신의 시신을 찾을 수 있도록 문신을 하고 아내에게 알려 주었으나, 아내와 가족이 모두 남원성에서 순국하여 문신을 새긴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처음부터 5만 6천의 정예 왜군과 의병을 포함한 4천여 명의 전투는 승산이 없는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전세는 시시각각으로 악화되어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복남은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을 불러 “우리의 갈 길을 갑시다.”면서 나뭇더미 위에 올라 불을 붙이게 하였다.

네 장수가 맹렬한 불길의 화염에 휩싸이자 이를 보던 군사들과 성민들이 일시에 통곡하며 무기란 무기를 있는 대로 집어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군기고를 지키던 감관 박기화는 무기를 화약고로 옮기고 화약고에 불을 붙인 후 그 속으로 뛰어들어 순국하였다.

추석 다음날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서 남원성의 민·군·관은 처절하면서도 장엄하게 죽어갔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은 남문·동문·서문이 무너진 후 마지막까지 고수하던 남원성 북문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르고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던 것이다.

[일본인이 본 남원성 전투]

당시 왜군에는 오오타 카즈요시[太田一吉]라는 장수가 있었고 이 장수의 군의관이었던 종군승 케이넨[慶念]이 있었다. 케이넨은 1597년 6월부터 1598년 2월까지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라는 일기를 썼는데 이를 통하여 남원성 전투의 참상을 알아보자.

8월 2일: 남원으로 넘어가는 높은 산은 일본에서도 아직까지 보지 못한 험한 산이다. 주위의 큰 바위들이 마치 갈아놓은 창검과 같다. 여기에 또한 무서운 폭포가 있다. 이 폭포는 마치 보기에 소름 끼치는 주검의 산채강 언덕이라 할까. 사람의 발도 말발굽도 견디어 낼 수가 없을 것 같다. (하략) 양원은 이러한 천험의 지형에 군사 한 명 배치하지 않고 왜군이 칼 한 번 뽑아보지 않은 채 남원성을 포위하게 했다.

8월 6일: 들이나 산이나 성곽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잿더미가 되고 사람을 칼로 치고 쇠사슬로 엮은 대롱으로 묶어서 부모는 아들을 부르고 아들은 어버이를 찾는데 아아, 불쌍하구나. 처음 보는 광경이로다.

8월 8일: 조선 아이들을 모두 사냥하듯 몰이하여 잡고 그들 부모는 칼로 쳐 죽여서 다시는 못 보게 한다. 그들의 비명과 한탄 소리는 마치 저승사자의 꾸짖음 같네.

8월 11일: 저녁 노을에 인가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은 모든 오곡과 재보가 불태워지고 재로 화한 것이니 (중략) 재로 변한 그 자리에서 하룻밤을 묵는구나.

8월 20일: 전주의 부중(전주부의 성 안)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3일 남짓 머무르면서 경도(일본의 수도)에서 온 사신과 만나 인진(引陳: 철수)을 상의하고 다른 부대와 의논하였는데, 여하튼 서울로 진격하게 되었다. 점점 날씨가 추워지니 서둘러 길을 나누어 전진한다는 것이다.

8월 21일: 남원에서 부상자가 많아 여기저기서 약을 달라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왕진을 바라는 부상자들이 너무 많다. 너무 딱하고 괴롭다. 저마다 고통에 겨워하는 부상자들로 가득하구나! 내 몸 하나임이 한스럽네.

[3세기 반 후의 일제 보복, 남원역]

왜군은 남원성에서 이기기는 하였으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주성에 도착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상자가 많았다. 특히 남원성 전투의 주력이었던 좌군은 더 이상의 전투를 치룰 여력이 없었다.

9월 8일 조명 연합군과 직산에서의 전투는 우군 단독으로 접전하여 대패하게 되고 우군 역시 패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남원성 전투에서 좌군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 않고 우군과 함께 진격했다면 직산 전투의 승패는 어찌 되었을까? 가슴이 서늘해진다.

결국 남원성 전투는 왜군이 승리하였으나 정유재란 전체로 본다면 남원성 전투로 인해 일본은 패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거나 잊고 있었다. 그것도 300여 년을 망각 속에서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이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남원성 북문에 대한 보복이 그것이다.

350년 가까이 지난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남원성 북문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남원역을 만들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북문 자리를 기점으로 플랫홈을 만들어 만인의총(萬人義塚) 본 무덤과 남원역사(南原驛舍)를 정확하게 갈라놓았다. 남원역사 자리와 역 광장은 남원성 전투 당시 마지막 항전 자리였고 성민 대다수가 순국한 현장이다. 순국의 현장과 무덤을 플랫홈으로 정확하게 차단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국의 후손들이 무심코 짓밟고 다니게 한 것이다.

이 사실에 의구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구 남원역 현장을 답사해 볼 일이다. 남원역은 열차가 상행(전주 방향)으로 출발하면 200m를 가지 못하여 도통동 급경사를 만나게 되고 급경사에 이어 곧바로 급커브를 만나게 된다. 열차가 가속이 붙기 전에 급경사를 만나는 것이고 급경사가 끝나기도 전에 급커브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사도가 어찌나 심한지 1976년 남원초등학교 학생들이 서울 수학 여행을 위하여 열차를 타고 남원역을 출발했는데 도통동 급경사를 다 오르지 못하고 화차가 뒤로 물러나 객차를 덮쳐 현장에서 16명 학생이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 세계를 통틀어 이렇게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역은 없다. 남원역의 하행 방향은 입지가 좋은 평탄한 지역이다. 남원성 서문 근방에만 역을 만들었어도 이런 참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만인의총은 왕산 자락으로 자리를 옮겨 옛 남원성을 굽어보며 왜적이 넘어 왔던 율치와 숙성령을 마주보고 있다. 남원역신정동으로 옮긴 지 몇 년이 된다. 일제의 잔악한 보복으로 만들어진 남원역이 어떻게 개발되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1590년대의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잊었던 우리는 1900년대에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일제는 남원성 북문에 보복했다. 이 사실을 잊는다면 우리는 또 언제 일본에 예속될지 모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과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남원을 비롯한 전라북도와 국가에서는 구 남원역 부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할 때이다.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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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제목 내용
2011.09.19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끝가지 남원성을 지키다가 ->끝까지 남원성을 지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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