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귀산본동에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나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공부를 그만두게 된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글을 가르치던 마을 어르신이 계셨다. 그분은 바로 고(故) 이수복 옹으로서, 일제강점기에 마을 구장도 했던 분이다. 대동아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그 해 8월 일본인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전쟁에 쓰던 물건들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수복 옹은 일본군...
1959년 9월에 발생한 태풍 사라호로 마을 저수지가 무너지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몇 년 동안 복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마을 이장이었던 이종현 옹은 영세민 취로사업과 복구공사를 병행하기로 작정하였다. 정부의 취로사업 목적은 영세민들의 연명(延命)에 있었는데, 이종현 옹은 연명과 저수지 공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었다. 이 시절은 봄에는 들로,...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삼귀사람(귀현, 귀곡, 귀산 세 마을 사람을 일컬음) 하면 섬[島]사람부터 연상되었다. 마을 앞은 바다요 뒤는 험준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타지 사람들에겐 섬 아닌 섬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귀산동의 면적은 10.6㎢에 인구는 3700여 명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30여 세대이고, 나머지 사람...
현재 귀산본동에 살고 있는 이종현 옹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1960년대 진해에 와 있던 미고문단과 색다르게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당시는 바닷가 마을이라 마을 부녀자들은 물때만 되면 바닷가로 몰려 나가 조개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아 식량을 구입하고, 또 자식들 학비를 조달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경기도 어디에서 미군이 구호물자를 영세민들에게 공짜로 나눠 준다는...
석교마을과 귀산본동에는 호롱불과 관련하여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1970년대 이 지역에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대부분의 집에서는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그런데 색깔이 뿌옇기만 하고 밝지는 않던 호롱불 대신 경유를 쓰는 호야(램프)로 불을 밝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값비싼 석유램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사는 게 힘들었던 그 시절에 호야를 값싼 비용으로 사용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