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324 |
---|---|
한자 | 馬山月影洞慶南大學校內石碑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원규 |
현 소재지 | 마산 월영동 경남 대학교 내 석비군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 |
---|---|
성격 | 비석 |
재질 | 석재[선상 ○세군 균역 영세 불망비]|철제[채학영 영세 불망비] |
크기(높이) | 180㎝[선상 ○세군 균역 영세 불망비]|120㎝[채학영 영세 불망비]|95㎝[묘지석 1]|98㎝[묘지석 2]|160㎝[문인석 1]|180㎝[문인석 2] |
크기(너비) | 38㎝[묘지석 1]|46㎝[묘지석 2] |
크기(두께) | 12㎝[묘지석 1]|19㎝[묘지석 2] |
소유자 | 경남 대학교 |
관리자 | 경남 대학교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의 경남 대학교 내에 있는 조선 후기의 비석군.
[개설]
경남 대학교 한마 미래관 뒤편에 철비(鐵碑) 1기와 석비 3기, 문인석(文人石) 2기가 있다. 원래는 경남 대학교 운동장 옆 숲 속에 옛 창원 대도호부사(昌原大都護府使)들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를 비롯한 석비 14기[선정비 12기, 일반비 2기]와 철비 1기, 문인석 2기가 함께 있다. 이들은 조선 시대 창원 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가 소재하였던 창원시 의창구 중동에 있었으나, 도시 개발과 함께 훼손의 우려가 있어 1975년 마산시가 경남 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선정비 11기는 2007년에 창원시가 용지 공원내에 조성하는 역사 테마 공원에 전시할 목적으로 반환을 요구해 되돌려 주었다. 남은 석조물들은 2008년 한마 미래관 완공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건립 경위]
‘선상 ○세군 균역 영세 불망비(船商○稅軍均役永世不忘碑)’는 징세와 균역에 대한 지침과 계도를 위한 권고를 목적으로 세웠으며, 철비인 ‘행 대도호부사 채공 학영 영세 불망비(行大都護府使蔡公學永永世不忘碑)’는 대도호부사 채학영[1848~1849 재임]의 치덕을 칭송하여 세운 비이다. ‘증 가선대부 한성 좌윤 겸 삼도 부총관 동래 정일우(贈嘉善大夫漢城左尹兼三都副摠管東萊鄭日佑)’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정공 한적(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鄭公漢迪)’의 두 비석은 묘비석인 듯하고, 두 개의 석상 역시 무덤을 지키던 문인석인 듯하다.
[위치]
현재는 경남 대학교 한마 미래관 뒤편에 있다. 이들 비석의 원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선상 ○세군 균역 영세 불망비’와 ‘채학영 영세 불망비’는 조선 시대 창원 대도호부가 소재하였던 창원시 중동에 있던 11기의 비석과 함께 1975년 12월에 경남 대학교로 이전해 왔다고 알려져 있다. 나머지 묘지석 2기와 문인석 2기는 언제 어떻게 경남 대학교로 이전되어 왔는지 경위를 알 수 없다.
[형태]
① 선상 ○세군 균역 영세 불망비 : 자연석의 받침돌[碑臺]과 몸통[碑身], 머리돌[螭首]를 갖추고 있으며, 각각 다른 돌로 구성되었다. 몸통과 머리돌의 재질은 역암이며, 받침돌은 화강암이다. 비의 전체 높이는 180㎝이다.
② 채학영 영세 불망비 : 화강암의 받침돌 위에 서 있는데, 몸통과 머리 부분(碑蓋)은 한 틀에 부어 주조한 철비(鐵碑)이다. 제작 연대는 1849년으로 부사의 임기 만료에 맞추어 제작된 듯 하며, 전체 높이는 120㎝이다.
③ 묘지석 1 : 장방형으로 크기는 95×38×12㎝이다. 받침돌이나 머릿돌은 없다.
④ 묘지석 2 : 장방형으로 크기는 98×46×19㎝이다. 받침돌이나 머릿돌은 없다.
⑤ 문인석 1 : 크기는 160㎝이다. 마모가 심한 편이다.
⑥ 문인석 2 : 크기는 180㎝이다. 마모가 심한 편이다.
[금석문]
① 선상 ○세군 균역 영세 불망비: ‘선상 ○세군 균역 영세 불망비(船商○稅軍均役永世不忘碑)’라는 비명과 함께 “백성은 지켜야 할 도리가 있나니, 이를 잊으면 화를 당하리라. 어찌 지키지 않으려 하리오, 또 장차 그리하면 큰 형벌을 받으리다. 삿된 경계심을 극복하고 법을 지키니, 우리 곳간을 넉넉하게 해 주시는구나. 우리 곳간이 이미 넉넉해 졌으니, 오로지 백성들은 복을 얻은 것이로다. 꼭 필요한 것만 규정하였으며, 원님은 균등하며 공평하시느니라. 이미 모두가 조화롭고 공평하지 백성이 어찌 편치 않으리오.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는가, 누가 감히 받들지 않으리오. 우리 모두가 지킬 것을 맹세하도다. 다 함께 우리 삶이 즐거우리라[惟民有常 惟失支傷 豈惟其失 且將剝膚 克競乃猷 俾裕我庾 我庾旣裕 惟民有祜 惟定有要 侯均侯平 旣均且平 民胡不寧 敦敢不服 敦敢不擎 庶我誓守 胥樂我生].”라는 시를 적어 국가에 대한 의무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② 채학영 영세 불망비: ‘행 대도호부사 채공 학영 영세 불망비(行大都護府使蔡公學永永世不忘碑)’라는 비명과 더불어 “우리 부사 창원 고을에, 어이 이리 늦게 오셨나. 창고와 곳간이 가득하고, 우리 마을은 교화가 되었네. 덕화가 두루 미쳐, 고을 풍속을 바로 섰네, 공을 위해 쇠에 새기나니, 만세토록 영원하리라[我公方 來何暮 倉廩實 方泯化 德致溥 風立府 爲公銘 斯萬歲].”라는 대도호부사의 선덕을 칭송하는 시를 새겼으며, 기유(己酉)년 4월에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의의와 평가]
경남 대학교 한마 미래관 뒤편에 서 있는 비석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옛 관청 주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송덕비의 일종이다. 그러나 그 내용과 재질에서 일반 송덕비와는 사뭇 다르다. ‘선상 ○세군 균역 영세 불망비’는 백성들에게 균역 의무의 중요성을 알리면서,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는 징벌이 가해짐과 동시에 잘 이행할 때 모두가 조화롭고 공평하게 살 수 있음을 계도하고 있다. 아마 이 비석은 마을의 입구 등에 세워 백성들에게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알리는 홍보와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희귀한 역사 자료라 할 수 있다. ‘채학영 영세 불망비’는 대도호부사를 지낸 채학영의 선정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고을 사람들이 세운 영세 불망비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송덕비와 별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철이라는 생소한 소재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