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35 |
---|---|
한자 | 莞浦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고려 시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설치한 특수 행정 구역.
[개설]
완포향(莞浦鄕)이 언제부터 창원시 진해구의 지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완포현으로 승격되는 1281년(충렬왕 7)까지는 합포현의 완포향이었다. 1281년에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공로가 있다 하여 완포현으로 승격되어 금주[지금의 김해]의 관할이 되었다. 이후 조선 문종 때 웅천현의 속현이 되었다. 1908년에 창원부(昌原府)에 속하였으나 1914년 마산부(馬山府)가 설치될 때 마산부에 편입되었다.
완포는 조선 시대에 수군의 주요 기지였다. 『세종 실록 지리지』에는 선군(船軍) 840명, 영진군(營鎭軍) 120명, 군정(軍丁)·시위군(侍衛軍) 47명이 있어, 이곳의 주민 1,079명과 거의 같은 숫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대동여지도』에서는 완포가 유성(有城)으로 표기되었고, 서쪽 해안의 풍덕포(豊德浦)도 옛 진지[고진보(古鎭堡)]로 나타나고 있다. 완포의 진산인 고산(高山)에는 남쪽의 사화랑(沙火良)과 북쪽의 성황(城隍)을 연결하는 봉수가 있었다.
지형은 동쪽의 장복산(張福山)에서 갈라져 나온 2개의 산줄기가 남북을 가로막고 있어 해안을 끼고 있는 작은 분지 형태를 보이고 있다. 교통 상으로는 웅천과 창원을 연결하는 도로가 발달하였으나 거리상으로는 창원이 가깝고 손도진(孫渡津)을 통하여 합포(合浦)와도 연결되었다.
[관련 기록]
완포 폐현은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본래 합포현 완포향인데 고려에서 현으로 승격하여 금주[지금의 김해]에 예속시켰던 것을 본조 문종 대에 본현에 내속시켰다[완포폐현(莞浦廢縣) 재현서삼십리(在縣西三十里) 본합포현지완포향(本合浦縣之莞浦鄕) 고려승위현속금주(高麗陞爲縣屬金州) 본조문종시래속(本朝文宗時來屬), 『신증 동국 여지 승람』 권32, 웅천 고적조].
[변천]
현 창원시 진해구 지역이 언제부터 완포향이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시대인 1281년(충렬왕 7)에 완포현으로 승격되기 전까지는 향(鄕)으로서 합포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완포현으로 승격된 이후 금주[김해]에 소속되었다. 조선 시대 문종 대에 현이 폐지되고 웅천현에 소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