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1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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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追敬閣 |
영어의미역 | Chugyeonggak Pavilion for Purificatio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적현동 산2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태성 |
성격 | 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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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목조기와 |
건립시기/일시 | 1920대 후반~1930년대 초반 |
정면칸수 | 5칸 |
측면칸수 | 3칸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창원시 적현동 산20 |
소유자 | 창원황씨 종친회 |
관리자 | 창원황씨 종친회 부회장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적현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창원황씨 재실.
[개설]
김종하의 『창원군지』「추경각기(追敬閣記)」에 의하면 추경각이 지어지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창원황씨의 시조 시중공(侍中公)의 분묘는 창원의 적현(赤峴)에 있다. 옛날에 재실이 있었는데 영모재(永慕齋)이다. 창원황씨인 상서(尙書) 황기연(黃耆淵)이 매번 제사의 일을 주관하였으나 재실이 좁아서 다 수용하지 못하였다. 황기연이 1917년 『하려선생문집(下廬先生文集)』을 이곳 재실에서 간행하였으나 책판을 저장할 방도가 없자 황수건(黃洙建)이 장산재(長山齋)를 지어 전각으로도 삼고 책판을 옮겼다.
상서공 황기연이 돌아가고 상서공의 종조(從祖) 아우인 군수(郡守) 황익연(黃翼淵)과 종자(從子)인 시랑(侍郞) 황연수(黃演秀)가 종인(宗人)들과 의논하기를 “우리 시조의 후예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제숙(齊宿)하는 장소가 매우 좁은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고 드디어 재실 서쪽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터를 닦고 새로 네 칸의 집을 짓고 ‘추경각(追敬閣)’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변천]
추경각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추경각기」의 내용을 보아서는 『하려선생문집』이 발간된 1917년 이후이다. 그 이후 곧이어 장산재를 지었고 장산재를 지은 뒤에 추경각을 지었으니 재실을 짓고 사당을 지을 때의 시간이나 경제적 여건 등을 고려하면 대략 1920대 후반이나 1930년대 초에 지어졌을 것이다. 이 후 1998년에 이곳이 산업폐기장으로 수용됨에 따라 2004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형태]
네모진 담장으로 전체를 둘렀다. 입구는 솟을대문으로 성추문(省楸門)이라 한다. 대문의 왼쪽에 염수재(念修齋)가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콘크리트와 목조, 벽돌을 조합하여 지은 집이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건물이 있는데 물건을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대문 정면에는 나머지 건물들보다 한 단이 높은 기단에 본당 건물인 추경각(追敬閣)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목조 기와 건물이다.
[현황]
추경각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7일 창원황씨 시조 황충준(黃忠俊)의 묘제를 모시고 있다. 2004년 추경각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고 나서 이곳에 관리사를 두고 창원황씨 종친회 부회장이 거주하고 있다. 추경각과 부속 건물들은 전체가 사각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동서남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추경각 뒤에는 시조 황충춘과 여러 선조들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