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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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祠宇 |
영어음역 | sau |
영어의미역 | shrin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임호민 |
[정의]
선조나 선현의 신주(神主)나 영정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곳.
[개념]
사우(祠宇)는 선현 봉사와 후학 양성을 목적으로 건립된 서원과 문중의 중요 인물의 제향처로 활용되었던 재실의 의미를 함께 갖고 있다.
[분류]
강릉 지역에서는 서원은 2개이고, 사우는 12개, 당은 4개, 재사는 56개이고, 기타로 문정공부조묘와 종선각이 있다. 위의 현황에서 향중사림이나 부민 발의로 건립된 오봉서원, 송담서원, 화부산사, 종선각, 문성사를 제외한 나머지 70개는 문중이 주도되어 건립된 사우·재실들이다. 이를 성씨별로 보면, 최씨가 17개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김씨 16개, 박씨 8개, 권씨 5개, 심씨 각 4개, 정씨, 함씨 조씨 각 3개, 이씨와 전씨 각 2개, 홍씨, 황씨, 선씨, 곽씨, 손씨, 주씨 각각 1개씩이다.
이것을 다시 본관별로 구분해 보면, 강릉 41개이고, 안동 7개, 삼척 4개, 창령 3개, 정선과 영일 각 2개, 그리고 동주, 초계, 영해, 안성, 남양, 평해, 보성, 초계, 밀양, 경주 그리고 기타 등이 각각 1개씩이다. 이중 강릉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41개를 다시 성씨별로 구분해 보면, 강릉최씨 16개, 강릉김씨 14개, 강릉박씨 7개, 강릉함씨 3개, 강릉곽씨 1개이다. 그리고 강릉최씨는 3개의 대종(大宗)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필달(必達)계로 9개이고, 둘째 문한(文漢)계 5개, 셋째, 입지(立之)계 2개이다. 따라서 하나의 본관으로 가장 많은 사우·재실을 보유하고 있는 문중은 강릉김씨[16]이고, 그 다음은 강릉최씨 필달계[9]이며, 다음은 강릉박씨[7], 강릉최씨 문한계[5]와 안동권씨[5], 삼척심씨[4], 창령조씨[3], 정선전씨[2]와 영일정씨[2], 기타 순으로 나타났다.
강릉을 본관으로 하지 않은 성씨들의 경우 대부분은 낙향시조를 모셨거나 아니면, 낙향한 후 가문에 출중한 영예를 끼친 선조들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 또는 재실을 건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씨별, 본관별 분류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사우·재실이 토성들에 의해 건립되었고, 나머지는 강릉에 낙향한 그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어졌다. 또 재지사림이나 부민의 발기로 건립되어진 사우·재실도 있으므로 건립주체를 기준으로 크게 구분하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문중이 중심이 된 것과 향중사림이나 부민이 주체가 된 것으로 구분된다.
[배향인물]
배향인물로 보면, 서원의 경우 향중 사림들이 건립을 주도하면서 중국의 유현인 공자와 주자를 모신 오봉서원과 강릉 태생인 율곡을 모신 송담서원이 있다. 향현사에는 첫째, 효행으로 향촌에 귀감이 되었던 인물들이며, 둘째, 향교 중수나 향약 시행과 같은 성리학적 지배질서에 충실했거나 향약 보급에 기여했던 인물, 세째, 중종조 기묘사화에 연루된 인물로서 영남사림들과 학문적 교류를 맺었던 도학정치를 부르짖던 개혁인사들이다.
화부산사는 향중 부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며, 그 건립 시기 역시 가장 빠른 통일신라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건립에 대한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기는 자료의 부족으로 어렵다. 이곳에 배향된 인물은 김유신이다. 김유신을 배향한 까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당시 말갈족이 자주 북방을 침입함에 따라 김유신은 왕명을 받고 명주로 와 화부산에 진을 치고 오대산에서 무술을 익히고, 팔송정에서 기마술을 익혔다. 이에 명주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은 그에 대해 감은(感恩)하였으며, 그의 사후 지방민들이 중심이 되어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유진처(留陣處)인 화부산 기슭에 사우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받들어 왔다고 한다.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787번지에 있는 종선각은 옥계 지역 유림들이 관리하고 있는데, 이들의 선조들이 1782년에 건립하였다. 선조들의 선한 업적을 보존하고 후세대의 륜리도덕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후손들의 정성을 모아 건립한 이 재사는 후손들이 마련한 공동기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종선각의 비문을 보면, 퇴계 이황의 후손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1755~1831]이 산계리 사곡동(寺谷洞) 사지에 흥곡강당(興谷講堂)을 건립하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고씨, 우씨, 전씨, 강씨, 유씨, 박씨, 이씨, 금씨, 한씨, 장씨, 홍씨 등 제씨들이 이야순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그러므로 종선각은 퇴계 문인인 이야순을 비롯해 그에게서 수학한 문하생들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제향처이다.
나머지 사우와 재실들은 모두 문중이 중심이 되어 자기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선현을 모셨다. 그리고 위에서 개별적으로 설명한 사우외의 경우는 시기적으로 1900년대 중반 이후와 최근에 세워진 것들이다.
[건립시기별 특성]
강릉 지방 사우와 재실은 18세기까지는 숫적으로 그리 많지 않지만, 19세기에 이르면 숫적으로 매우 증가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16개에 이르는 많은 사우와 재실이 건립되어지고 있다.
시기별 특징을 살펴보면, 임란 전부터 18세기까지는 향중사림이나 문중이 건립주체가 되는 경우가 비슷하나 18세기에 이르면서는 향중 공론에 의해 건립되는 경우는 찾을 수 없고 모두 문중이 중심이 되어 건립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숙종대의 서원신설금지령과 영조대에 서원훼철령에 의해 향촌 내에서의 서원건립이 어렵게 됨으로써 이런 금령을 피하기 위해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사우를 건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추이에 따라 강릉 지방에서는 자기 가문 출신의 특정인물의 현양을 위한 제향처로서 재실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8세기에 이르면, 사우의 건립보다는 재실의 형태로 건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점은 후손·동족에 의한 자제교육의 장소라기보다는 봉사 위주의 성향이 현저해진 상태에서 가문의 권위를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또 가문의 결속력 강화를 도모하는 문중활동으로 대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