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3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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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鄕賢祠 |
영어음역 | Hyanghyeon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2920-16[교동 238-3]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대길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1년 12월 16일 - 향현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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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향현사,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
성격 | 사당 |
양식 | 겹치마 맞배지붕 |
건립시기/일시 | 1645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2920-16[교동 238-3] |
소유자 | 향현사문중 |
문화재 지정번호 | 강원도 유형문화재 |
[정의]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 있는 사당.
[개설]
향현사는 강릉 지방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사람의 행적을 후세에 전하여 귀감을 삼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행하는 곳으로, 최치운(崔致雲) 등 6인을 배향하고 있다.
[건립경위]
강릉 향현사 건립은 이 지역 오봉서원이나 송담서원의 경우와 같이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관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루어졌다. 1644년(인조 22) 7월 전 목사 이상험(李尙謙)과 전직장 김충의(金忠懿), 진사 박진해(朴震楷), 사인 최언기(崔彦琦) 등이 발의하고 향신사 180여 명이 참여하여 부사 강백년(姜栢年)에게 호소하였다. 이것을 조정에 올려 허락을 받아 1645년 8월 읍치 동쪽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변천]
향현사에 배향된 인물은 처음에는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 삼가(三可) 박수량(朴遂良), 사휴당(四休堂) 박공달(朴公達),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 도경(蹈景) 최운우(崔雲遇) 등 육현(六賢)으로 강릉최씨 4명, 강릉박씨 2명이었다. 이후 배향 인물에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1682년(숙종 8) 춘헌(春軒) 최수(崔洙)가 추향되고, 1759년(영조 35)에는 눌재(訥齋) 이성무(李成茂), 보진재(葆眞齋) 김담(金譚), 농헌(聾軒) 박억추(朴億秋) 등 세 명의 향현이 추향되었다. 그리고 다시 1808년에 와서 괴당(槐堂) 김윤신(金潤身)과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이 배향되어 163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추향 또는 승향(陞享)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향현사에 배향된 인물들은 나름대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최치운·최응현·최수성은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사람의 근본 도리인 효행에 있어서는 일향에 모범을 보인 자들이고, 박수량은 생시정려를 받았고, 박공달은 효행이 뛰어났다. 최응현은 학문적으로 김종직의 문인과 교류하였고, 박공달·최수성은 김정(金淨) 등과 교우하면서 기묘사화의 화를 입는 등 도학정치를 내세운 인물들이었다. 이성무·김담·박억추는 효행으로 이름을 올린 자로 효를 근본으로 한 유교적 인간상의 확립을 위한 정표정책(旌表政策)과 관계가 있으며, 김윤신은 학문과 효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시 배향인 선정 논의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대체로 강릉 지역의 문풍 진작과 교화에 공헌하고 성리학적 지배질서 확립과 관계가 있는 인물들을 선정하였다. 향현사가 본래 있던 곳은 현재의 위치가 아니며, 예전의 향현사는 1867년 강릉 지방의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향현사가 소실된 뒤 지역에서 이를 복구하고자 하였으나 1868년 비사액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좌절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21년 배향인물의 후손들이 건립한 것인데, 1996년 황영조(黃永祚)기념체육관 건립 관계로 바로 뒤편으로 이전하였다.
[형태]
전면 3칸, 측면 2칸의 겹치마 맞배지붕으로 3량가로 결구하였다. 전열 퇴간에는 둥근 주초석을, 그 외는 네모난 주초석을 두고 그 위에 둥근기둥과 각기둥을 세웠다.
[현황]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삭망에는 분향을 하고, 음력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례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