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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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成茂 |
영어음역 | Yi Seongmu |
이칭/별칭 | 백원당(百原堂),성시(聖始),눌재(訥齋)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도식 |
성격 | 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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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이장밀(李長密) |
어머니 | 최하(崔河)의 딸 |
아우 | 이선무(李善茂)|이춘무(李春茂)|이양무(李良茂) |
출신지 | 강릉 |
성별 | 남 |
생년 | 1370년(공민왕 19) |
몰년 | 미상 |
본관 | 영해 |
제향 |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2920-16[교동 238-3] 향현사 |
[정의]
조선 전기의 효자.
[가계]
본관은 영해. 자는 성시(聖始), 호는 눌재(訥齋). 아버지는 이장밀(李長密)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호장(戶長) 최하(崔河)의 딸이다.
[생애]
강릉 호가리(虎街里)[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에서 태어났다. 학문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 사람들이 백원당(百原堂)이라 불렀다. 일찍이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여 학문이 깊었고 문장도 뛰어났으나 가훈(家訓)을 이어받아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오로지 독서에 전념하였다.
[활동사항]
항상 아우들에게 이르기를 “부모를 섬기는 데는 아무리 몸과 마음을 다한다 하더라도 넉넉하다 할 수 없는 것이니, 우리 형제는 힘을 다하여 부모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모셔야 한다.”고 하였다.
송어나 연어 같은 것도 임금에게 진상(進上)하기 전에는 먹지 않았고, 국상(國忌)을 당했을 때는 부모상과 같이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하며 의대(衣帶)를 벗지 않고 지성으로 예를 다하였다. 어머니를 모시는 데에도 효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79세 때 병상에 눕게 되자, 아우들과 함께 향을 피우고 하늘에 빌기를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목숨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더니, 잠시 후에 어머니가 갑자기 깨어나서 하는 말이 “꿈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부인(夫人)의 네 아들의 효성이 이와 같으니, 하늘이 장차 좋은 벼슬을 줄 것이고, 또 부인의 수명을 길게 할 것이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어머니가 잉어회가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때는 매우 추운 겨울이라 잉어를 구할 길이 없었다. 이성무는 세 아우와 함께 행여나 잉어를 얻을까 하여 냇가에 나갔다. 그러나 냇가에는 얼음만 꽁꽁 얼어 있었다. 이성무는 얼음을 두드리며 하늘에 외치기를 “하느님 제발 잉어를 얻게 하여 어머님 병환을 고치게 하여 주십시오.” 하니, 갑자기 얼음이 저절로 풀리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나왔다. 이성무가 얼른 잉어를 가져다 어머니에게 드리자 어머니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웃 사람들이 감탄해 말하기를, “이 사람의 효는 하늘이 낸 것”이라 하였다.
이성무 형제의 효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태종이 가상히 여겨 1417년(태종 17) 4형제에게 효자정려(孝子旌閭)와 사정(司正)의 벼슬을 내리고, 이성무에게는 사헌부 감찰 벼슬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그러나 이성무는 “잉어를 얻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며, 아직도 효성과 우애의 정이 모자라는데 왕께서 주는 포상(褒賞)이 너무나 과분하여 부끄럽다.”고 하면서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태종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감복(感服)하여 “옛날 왕상(王祥)이 어머니 병에 얼음을 두드려 잉어를 얻었다 하거니와 오늘에 이성무 형제가 또한 그러하니 참으로 본받을 일이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759년(영조 35)에 향현사[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2920-16[교동 238-3번지]]에 배향되었다. 강원도 강릉시 교동 군정교(郡丁橋) 옆에 이성무의 4형제와 이양무 후손인 이당 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각(旌閭閣)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영해이씨 이세육효지려(二世六孝之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