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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536
한자 儒敎
영어음역 Yugyo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이칭/별칭 유학(儒學),공교(孔敎),공자교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집필자 유종국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공자를 시조로 하는 전통적인 사상과 학문을 이르는 말.

[개설]

유교는 공자를 시조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공교(孔敎)·공자교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의 이념으로 삼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정치학으로, 수천 년 동안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양의 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남원의 유교]

1. 향교와 서원

남원의 유교는 조선 초기 향교와 서원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향교에서는 유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교수(종6품), 훈도(종9품), 학장(품계 없음)의 세 교직원을 두어 고을의 크고 작음에 따라 교육자수를 조정하여 적절히 배치하였다.

향교에 입학할 수 있는 유생은 한문을 이미 익힌 양반 자제들로 되어 있으나 평민의 자제들도 입학할 수 있었다. 향교의 입학 정원은 부(府)·목(牧)에 있는 향교는 90명, 군(郡)에 있는 향교는 50명, 현에 있는 향교는 30명으로 되어 있다.

향교에서는 『소학』·『논어』·『맹자』·『대학』·『중용』·『근사록』 등 유교와 관련한 교과목만을 강의하였으며, 소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향교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의 변란과 사학 교육기관인 서원의 발흥으로 인하여 교육 기능이 점차 쇠퇴해졌다.

조선 중기 이후 성행하게 된 서원은 내부에 문묘의 분위기를 본따 사당을 뒤편에 짓고 유교 명현들을 향사하면서, 앞면에는 교실을 지어 유교 학문을 강의하였다. 조선 명종 이전에는 전국에 29개 서원이 있었는데, 점차 그 수효가 늘어 선조 때는 124개로 늘었다. 이처럼 서원이 많이 세워지면서 그동안 향교로 진학하던 유생들이 서원으로 모여 들었다.

이 무렵 전북 지역에는 서원만 40여 개가 세워졌고 사우(祠宇)만도 90여 개나 되었다. 남원 지역에는 창주서원·노봉서원·용계서원·용암서원·유천서원·용장서원·풍계서원·호암서원·영천서원 등 서원이 있었고, 사우로도 용장사·충령사·정충사·고암사·풍양사·구천사·십노사 등이 있다. 명현의 위패를 모시고 유생을 가르쳤던 서원사우로는 창주서원, 유천서원, 용장서원, 풍계서원, 호암서원, 영천서원, 풍양사, 구천사, 십노사 등이 있다.

2. 광한루와 유교

광한루는 고려시대에 황감평이 무인난을 피해 남원에 낙향하여 ‘일재(逸齋)’라고 하는 조그마한 서실을 지은 데서 비롯했다. 황감평은 유학자로서 조선 초기 유학자이자 명재상 황희의 6대조이다.

황희(黃喜)양녕대군 폐출 불가를 주장하다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으로 내려온 것은 1419년(세종 원년)의 일이다. 황희남원부 남쪽 2리쯤 떨어진 곳이 지대가 높고 평평하고 넓은 곳에 조그마한 누각을 지어 놓고 이름을 광통루(廣通樓)라고 했다.

이곳이 일재라는 서실이 있는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희가 남원에 내려와 살면서 누각을 지은 것은 그 서실로부터 착안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황희의 아들인 황수신(黃守身)이 이곳 남원을 방문하여 누각에 올라 지은 「누정기(樓亭記)」에 실려 전한다. 황희는 이곳에 내려와 도학과 유교의 도를 닦은 것으로 알려졌다.

황수신뿐 아니라 조선의 명현인 정인지김종직, 정철 등이 남원에 와서 유숙하면서 시문을 남겨 광한루에 올리기도 하였으니, 이곳이야말로 남원 지역이 유교와 풍류의 고장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3. 유교 명현의 성리학 보급 운동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전해 준 사람은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다.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안향의 9대손인 안처순(安處順)[1492~1534]이 지방관리로 재직할 때 그의 친한 벗들이 보내 온 편지를 모은 것이다. 안처순은 구례현감으로 부임할 때 국왕에게 향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임지에서 『근사록』을 간행, 보급하여 남원 지역의 유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남원 지역의 유학자들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 소산복은 1556년(명종 11)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에서 태어났는데, 머리가 명석하여 사서오경과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특히 천문과 산학(算學)에 조예가 깊었다. 1591년(선조 24)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의주 행재소를 왕래하기도 하였다.

소산복김천일 장군이 진주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함께 죽지 못한 것을 통탄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러고는 덕과면 만도리 향리에 집을 짓고 편액을 ‘문류정(門柳亭)’이라 하고, 당시의 선비들인 민여주·오정길·김선·이점·안창국·최행·양명원·안극충 등과 어울려 유학과 학문을 논하며 만년을 보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9.09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그중 소산복은 1556년(명종 11년) ->그중 소산복은 1556년(명종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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