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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548
한자 南原廣寒樓
영어음역 Gwanghallu
영어의미역 Gwanghallu Pavilion
이칭/별칭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광통루(廣通樓),일재(逸齋)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77-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유종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1월 21일연표보기 - 남원 광한루 보물 제281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남원 광한루 보물 재지정
성격 누각|관영 건축
양식 본루는 일출목 이익공 구조|익루는 초익공 구조|팔작지붕
건립시기/일시 1419년연표보기
정면칸수 본루 5칸|익루 3칸
측면칸수 본루 4칸|익루 2칸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77-1 지도보기
소유자 남원시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조경 건물.

[개설]

남원 광한루는 조선 전기 명재상 황희의 6대조인 황감평이 고려 때 무인난(武人亂)을 피해 남원에 낙향하여 ‘일재(逸齋)’라고 하는 조그마한 서실(書室)을 지은 데서 비롯했다.

이후 황희(黃喜)양녕대군의 폐출 불가를 주장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으로 내려왔다. 황희는 1419년(세종 1) 남원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이 지대가 높고 평평하며 풍광이 아름다워 보이자 이곳에 조그마한 누각을 지어놓고 이름을 광통루(廣通樓)라고 했다.

이곳이 일재(逸齋)라는 서실(書室)이 있는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희가 남원에 내려와 누각을 지은 것은 그 서실로부터 착안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변천]

1434년(세종 16)에 남원부사 민여공이 주변을 고치고 새로 누각을 중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황희의 아들인 황수신(黃守身)이 이곳을 방문하여 누각에 올라 지은 「누정기(樓亭記)」에 실려 전한다.

1437년(세종 19)에 남원부사 유지례가 단청을 하였다. 1444년(세종 26)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누각에 올라 “호남의 승경이로다.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라고 감탄한 나머지 이름을 광한루(廣寒樓)라고 바꿔 불러 오늘에 이르렀다.

1461년(세조 7) 남원 부사 장의국(張義國)은 요천의 물을 끌어다가 누(樓) 앞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커다란 연못을 파고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담긴 오작교를 가설하였다. 이 은하의 못 가운데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이 있다. 이는 영주(瀛州), 봉래(蓬萊), 방장(方丈)을 상징하는 것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만든 것이다.

남원 광한루는 역대 남원 부사, 전라 감사들의 보수와 공사로 인해 점차 천상(天上)을 상징하는 정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누각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1607년(선조 40)에 남원부사 원진이 소실된 누각 자리에 작은 누(樓)를 세웠다.

1626년(인조 4)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아우인 남원부사 신감이 작은 누(樓)를 헐고 그 자리에 원래의 크기로 복원하였다. 누각 정면의 현판은 선조의 사위였던 신흠의 아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글씨이다.

지금의 영주각은 1792년(정조 16)에 남원 부사 이만길이 세운 것이다. 1855년(철종 6)에는 남원 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라는 현판을 크게 써서 걸었다. 이 현판은 지금은 현관 옆에 걸려 있다.

1877년(고종 14) 광한루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지자 남원 부사 이용준이 건물 보수로 고민하고 있을 때 남원 수지면에 살던 추대목이 북쪽 누각을 오르는 계단을 만들어 익루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본루 못지않게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전에는 오르내리던 사다리만 있었으나 이 현관을 만듦으로써 우리나라 누각에 설치한 최초의 현관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 정책에 따라 누각 마루 위가 뜯겨 재판소와 감옥을 만드는 데에 쓰였다. 재판소와 감옥을 만들기 위해 징발된 돌기둥과 나무 기둥은 문고리를 설치한 흔적으로 군데군데 패인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광복 이후 재판소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고 지역 유지들이 다시 징발된 재료들을 가져다가 수차례 크고 작은 보수를 하면서 누각을 관리하였다.

[형태]

남원 광한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본루(本樓) 옆으로 익루(翼樓)가 이어져 있는 장대한 규모이다. 본루와 익루는 지붕에 단차를 두었지만 평면을 하나로 이어놓았다. 누하주(樓下柱)를 높게 세워 마루를 높이 구성한 2층 누각 형식으로, 누마루 주위는 계자 난간을 돌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들창을 달아 사방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낮은 외벌대 기단 위에 초석 받침을 놓고 세운 누하주는 위치에 따라 재료와 형태가 다르다. 전면과 네 귀는 모난 돌기둥을 사용했고 나머지 삼면에는 원형의 동발 기둥, 안쪽에는 둥근 나무 기둥을 세웠다. 광한루 북쪽에는 누(樓)에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익루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이다. 본루처럼 삼면에 퇴를 둘러 주위를 개방하고 안쪽에 2칸의 온돌방을 만들었다. 지붕은 본루와 단차를 두어 연결하고 한쪽은 팔작지붕으로 마무리하였다. 공포는 초익공(初翼工) 구조이다. 첨차 마구리에는 특이하게 도깨비와 여러 동물 얼굴을 조각하였다.

[현황]

남원 광한루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81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문화재관리청에서 남원 광한루 실측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광한루 보수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2001년부터 전면적인 해체 작업에 들어가 2003년에 보수를 완료하였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남원 광한루는 호남의 제일가는 누정답게 조선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다. 대부분의 누각이 천혜의 경승지에 위치해 있는 데 반해 남원 광한루는 인공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조선 시대 애정 소설의 백미인 「춘향전」의 무대가 남원 광한루인 것을 보아도 그 빼어난 승경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