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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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陵湖海亭 |
영어음역 | Gangneung Hohaejeong Pavilion |
이칭/별칭 | 호해사(湖海祠)/태허정(太虛亭)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저동 433번지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호민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9년 5월 30일 - 강릉호해정,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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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강릉호해정,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
성격 | 누정 |
양식 | 단층팔작기와지붕 |
건립시기/일시 | 조선 중기 |
관련인물 | 김지(金輊)|김몽호(金夢虎)|김창흡(金昌翕)|장호(張昊) |
정면칸수 | 2칸 |
측면칸수 | 2칸 |
층수 | 단층 |
소재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저동 433번지 |
소유자 | 강릉김씨 |
문화재 지정번호 | 강원도 유형문화재 |
[정의]
강원도 강릉시 저동 경포호의 북쪽 언덕 위에 위치한 누각.
[개설]
강릉호해정은 1979년 5월 30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강릉호해정은 당초 현감(縣監) 김지(金輊)의 후손 습독공(習讀公) 김계운(金繼雲)이 창건하였고, 습독공은 후손이 없자 큰사위인 별감(別監) 장호(張昊)에게 증여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장별감은 자신의 호를 따서‘태허정(太虛亭)’이라 정자명을 개칭하였다.
태허정은 이후 소실된 것으로 전하며, 장별감 역시 후사가 없어 조카사위인 공조참의(工曹參議) 김몽호(金夢虎)에게 정자터를 증여하였다. 그 후 김몽호는 기장현감(機長縣監)을 역임한 넷째아들 김득헌(金得憲)에게 증여하였으며, 김득헌은 다시 사위인 사인(士人) 신만(辛晩)에게 양도하였다. 오늘의 강릉호해정은 1750년(영조 26) 신만의 증손인 진사(進士) 신정복(辛正復)이 건립하였다.
1834년(순조 34) 김몽호(金夢虎)의 후손들이 신씨(辛氏)로부터 이 정자를 인수하여 관리하게 되었으며, 1913년부터는 옥천동 영당(影堂)에 봉안되었던 김몽호의 영정을 이곳에 이봉하고 매년 음력 9월 중정(中丁)에 다례(茶禮)를 올리고 있다.
[건립경위]
1718년(숙종 44) 학덕을 갖춘 대학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강릉에 들렀다가 경포호의 경관에 매료되어 이곳을 명승지라 감탄하였다. 이때 신만의 아들 신성하(辛聖河)는 삼연을 위해 이곳에 작은 초옥(草屋)을 지어 거처케 하였다. 선생은 이를 몹시 좋아하여 1년 가까이 이곳에 머물면서 학문과 시문을 강론하였다. 삼연이 떠난 뒤 30여 년 동안 선생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곳을 찾아들었으며, 신성하의 손자 진사 신정복(辛正復)은 삼연의 뜻을 받들어 제자들을 모아 이곳에서 강론하였다. 그러던 중 1750년(영조 26) 삼연의 정취가 서린 초옥이 소실되었다. 신정복은 이를 몹시 민망히 여겨 이곳에 다시 누각을 건립하였으며, 이것이 오늘의 강릉호해정이다.
[위치]
[형태]
정자는 단층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이다. 내부는 방 1칸, 영당 1칸, 우물마루방 1칸으로 건축되었다.
[금석문]
정자의 전면에는 초서체 “호해정(湖海亭)”과 측면에 해서체 “호해정(湖海亭)” 현액이 걸려있다. 그리고 병신년 맹추에 훈곡(薰谷) 홍희준(洪羲俊)이 쓴 “「호해정기(湖海亭記)」”와 무술년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이 쓴 “「김씨호해정기(金氏湖海亭記)」”, 갑술년 4월 후손 김병환(金秉煥)이 쓴 “「호해정중수기(湖海亭重修記)」” 등 3개의 기문이 있다. 또한 옥산(玉山) 이우(李瑀)가 정자의 소유주인 장호에게 증정한 “호해정(湖海亭)” 시판과 지봉(芝峯)의 “추일즉사(秋日卽事)” 후손들이 적은 시문, 김창흡의 “「금강귀로등임공부(金剛歸路登臨共賦)」” 등이 있다.
[현황]
과거에는 누각 앞이 호수였으나 지금은 매립되어 주택단지와 농경지로 조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강릉호해정은 재지 사족 가문의 재산 증여와 성장 과정을 살필 수 있는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