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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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昌翕 |
영어음역 | Kim Changheup |
이칭/별칭 | 자익(子益),삼연(三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대길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 김상헌(金相憲)의 증손이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해주목사 안정나씨(安定羅氏)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인 김창집(金昌集), 조선 후기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을 주장한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이다.
[생애]
삼연 김창흡은 15세 때에 형 김창협의 장인인 이단상(李端相)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73년 진사가 되고, 1684년 장악원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721년 집의, 이듬해 세제시강원진선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1709년부터 5~6년간에 걸쳐 치열했던 심성론을 둘러싼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의 시비에서 낙론을 취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지금의 포천]에 은거하였으며, 이후 강릉 호해정(湖海亭)에 약 1년간 머무르면서 향촌의 동학(童學)과 유림들에게 강론을 해주었다. 신임사화로 인해 유배된 형 김창집이 사사당한 후 지병이 악화되어 별세했다.
[학문과 사상]
『장자(莊子)』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좋아하고 시도(詩道)에 힘썼다.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해 슬픔을 잊으려 하였으며 후에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유학에 전심하였다. 성리학에 밝아 형 김창집과 함께 이름이 있었으며 이이(李珥) 이후의 대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사상적 경향은 대체로 이황(李滉)과 이이를 절충하는 태도를 지녔다.
[저서]
『삼연집(三淵集)』과 『심양일기(瀋陽日記)』가 있으며, 『안동김씨세보』를 편집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고,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강원도 강릉시 저동 433번지 호해정 영당에 제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