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405
한자 城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성부제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지역에 있었던 성곽.

[개설]

성(城)이란 보통 성벽(城壁)을 가리키지만 의미는 매우 넓다. 전형적인 성곽은 네모꼴로 쌓은 성과 바깥에 네모꼴로 쌓은 곽(郭)으로 구성되는 이중의 벽으로 구성된다. 안쪽의 것을 성, 또는 내성(內城)이라 하고, 바깥쪽을 곽(郭) 혹은 외성(外城)이라고 한다. 삼중인 경우에는 맨안쪽을 내성, 다음을 중성(中城), 바깥을 외성이라고 한다. 도성(都城)의 경우는 왕성(王城)·궁성(宮城)·황성(皇城)이라 부르고, 바깥쪽의 것은 나성(羅城)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흙을 파서 도랑을 만들거나 흙으로 쌓았으나 기술이 발달하면서 나무로 만든 목책(木柵)과 돌로 쌓은 석축(石築), 벽돌로 쌓은 전축(磚築)도 생겨났다.

지형적인 조건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여러 가지 모양의 성곽이 발달하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산지가 많아 특히 산성(山城)이 발달하였다. 또한 네모꼴보다는 자연적인 포곡선(包谷線)을 형성하는 부정원형(不整圓形)이 많다. 옛말에 성(城)을 ‘잣’이라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성이 중국 계통이 아님을 알려 주는 말이다. 대체로 청동기시대에는 신전이 나타나 신성 구역이 있으며, 이때 신전을 포함하여 지배자의 거주지를 둘러싼 성이 등장하게 된다. 이때의 성곽은 집락(集落)의 형성과 지배자에 의한 노동력의 징발, 곧 정치집단의 발생을 전제로 하므로 국가의 기원과 연계된다. 고전적 성곽 발생 이론에 따르면, 농경 집단이 유목 집단의 약탈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성곽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넓은 농경지를 가진 배후의 낮은 구릉 위에 쌓은 성곽들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남부 시베리아 지방에서 만주 지방에 걸치는 도피용 목책과 관련지어서, 일찍부터 방어용인 산성 위주의 성곽이 많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산의 성곽]

일반적인 성곽은 주로 석성을 연상하는데 예산 지역에 존재한 석성은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성인 임존성이 있고, 백제 오산현 치소였던 예산읍 산성리 무한산성, 조선시대 치소였던 대흥면 동서리 대흥읍성, 상중리 석성, 덕산면 사동석성, 삽교읍 이리 수암산성, 고려 말 이산진의 영이었다가 해미로 이전한 후 덕산읍치가 된 신평리 덕산읍성, 봉산면 시동리 대천태산성과 소천태산성, 신양면 죽천리 산성 등이고 백제시대의 산성은 임존성, 무한산성, 사동석성, 시동리 산성 등이 있다.

예산 지역의 토성은 예산읍 석양리 토성, 삽교읍 상성리 토성, 이리안다락미토성, 밖다락미토성, 고덕면 상장리 토성, 광시면 장전리 토성, 덕산면 신평리 돗도성, 대흥면 신속리 토성, 대술면 마전리 토성, 봉산면 봉림리 산성 사석리 산성, 신양면 연리산성, 귀곡리 수조리 산성, 불원리 산성 등이 있다. 1995년 『지표조사보고서』에서 삽교읍 성리토성, 수촌리 토성도 나오지만 현지 조사 결과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성이란 적으로부터 치소를 보호하는 목적이 크므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성을 쌓았다. 예산 지역의 성은 두 개 권역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덕산 권역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있고, 또 하나는 예산 권역으로 나뉜다. 예산읍 예산산성대흥면 신속리 토성은 아산만에서 남쪽으로 침투하는 적을 막는 목적으로 백제시대 축조한 거점성이다. 그런데 덕산 권역은 고려 말 이산진이 있었고, 백제 사동석성, 봉산면 백제 대천태산성과 소천태산성의 존재, 조선시대 축조된 이리 수암산성 등으로 보아 해당 지역이 고대부터 조선까지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예산 지역에는 조사되지 않은 산성이 아직 남아 있고 일부 면지에 성이 아닌 것을 성이라고 기록된 부분은 정밀 조사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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