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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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土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성부제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지역에 있는 흙으로 축조된 성.
[개설]
토성은 흙으로 만든 성을 말한다. 성을 축조한 목적은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무기가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울타리만 제대로 쳐도 방어 시설이 되었으나 무기가 발달하며 영구적인 방어 시설물을 축조하게 되었다. 토성은 재료가 흙이므로 위치만 제대로 설정한다면 영구적인 방어 시설물이 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토성이 축조되었는지는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에 말이 없었고 성이 없었다.”라고 하였는데 원산, 금현 두 성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평시에 목책을 둘러 보호하던 근거지가 외부인들의 침입이 있자 토성과 목책을 함께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에 ‘임존산 대책 소책’이란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처음 책을 설치하고 후에 성으로 된 것을 알 수 있다.
토성은 위치에 따라 평지성과 산성으로 구분되는데 평지성은 평야지에 축조하여 흙을 제방 둑처럼 쌓아 올린 형태이고, 산성은 산이 있는 곳에 경사면을 이용하여 위 흙을 아래로 파내려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 주를 이룬다. 골짜기를 포함한 포곡식, 산 정산부에 설치한 산정식(山頂式)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돌을 사용하지 않고 흙을 사용하였다. 서울 풍납토성의 경우 판축 기법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축조하였으나 예산 지역의 산성은 대부분 흙을 삭토하여 쌓는 형식이고 구체적 현황은 발굴 조사가 없어 알 수 없다.
성은 외적 침입 시 외부와 단절되어 곡식, 땔감은 비축이 가능하나 식수는 외부에서 끌어올 수 없으므로 필수적으로 샘이 있어야 한다. 포곡식 산성은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식수원인 샘이 있으나 산정식 같은 경우는 물이 없는 경우가 많아 건수나 빗물을 모으는 시설을 설치하였다.
[예산지역의 토성]
예산 지역에도 무수한 토성이 존재한다. 현재 공식적으로 조사 보고된 것은 『충남지역의 문화유적』에 실린 것이 유일한데 조사에서 누락된 토성도 있다. 자료에 의하면 예산읍 서부 지역인 삽교읍 지역은 조사가 잘 되어 있으나 다른 지역은 알 수가 없다. 현재 토성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구는 상성리 토성, 고덕면 상장리 토성, 대천리 금후산성, 대흥면 신속리 토성, 대술면 마전리 토성 정도이고, 삽교읍 안다락미산성, 밖다락미 산성, 광시면 장전리 토성은 훼손이 심하여 확인이 어렵고, 성리 토성과 수촌리 반챙이 토성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이외에 토성이 확실하나 확인이 불가능 한 것은 예산읍 석양리 토성, 예산읍 산성리 토성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예산 지역의 토성은 기존의 지표조사를 통해 살펴보면 삽교천 유역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마한 목지국의 왕도를 이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성리에 과연 성이 있었는지. 지명이 변이된 것인지 시굴 조사 없이는 확인할 수 없다. 현지 녹취에 의하면 성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예부터의 전언이 아니고 1987년 『예산군지』의 내용이 주민에게 유입되었고 『삽교읍지』에도 현지조사 없이 1995년 성부제가 『예산의 지명유래』성리 목지국설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후에 주민 탐문 조사 결과 선돌은 있었으나 고인돌은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1998년 『예산의 지명유래』 수정본에서 마한 목지국의 왕도를 예산읍설로 바꾸었다.
지표조사에서 상장리 토성, 신속리 토성은 백제의 유물이 조사되어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 이 지역의 관방 시설의 역할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상장리 토성은 대천천 바로 옆에 있어 해수가 들어왔고, 신속리 토성은 무한천 옆에 있어 조선 후기에도 배가 왕래하였다는 전언이 있다. 신속리 토성 5㎞ 북쪽에 백제 예산산성이 있어 주요한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예산에서 부여까지는 100리[약 40㎞] 남짓의 거리여서 삽교천으로 침투하는 적을 차단하는 성이었고, 부여도로 가는 중요한 군사 거점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