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1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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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Tumulus in Ulleungd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선사/청동기,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희돈 |
[개설]
울릉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울릉도에 남아 있는 고고학적 유적 중에 청동기시대의 표식적 유적으로 파악되는 고인돌 유적이 일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어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격적인 고고학적 유적으로 포함되는 고분군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다수 발견됨으로써 울릉도 역시 이 시기에 어느 정도 위계를 갖춘 집단이 무리를 이루어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취락지 안에 존재하는 고분 유적과 생활 유적]
현재까지의 지표조사 결과 울릉도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적들을 보면 고분유적이 14개소이고 유물산포지가 4개소, 기타 1개소이다. 유물산포지는 구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확인이 가능하나 현재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생활유적의 일종으로 보인다. 유적이 분포된 지역을 보면, 고분유적의 경우 대체로 해안가의 저지성 구릉지와 산록 완사면에 분포하는 비율이 높으며, 생활유적 역시 고분유적을 포함한 주변의 산록 완사면에서 확인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생활유적으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 및 패총유적이 많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현포리와 천부리, 중령 등의 고분군을 포함한 유물산포지의 예로 보아 울릉도에서는 고분유적과 생활유적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기보다는 취락지 내에 서로 혼재되어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남서리 고분군과 남서리 유물산포지의 경우, 고분유적은 입지와 경관이 뛰어나고 석재를 구하기 쉬운 내륙의 산록 경사면과 산록 완사면에 축조하였고, 취락지는 그 아래의 하천과 해안가 주변에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생업경제의 단서를 제공하는 패총유적]
고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패총유적이다. 196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사한 현포동 유물산포지에서 나온 패각류와 동물뼈 등은 당시의 생업 형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현포동 유물산포지에서 출토된 패각류로는 소라·바다우렁·전복 등이 있으며, 동물뼈로는 도미와 대구어 등의 어류와 가재와 같은 갑각류, 그리고 소[牛] 등이 있는데, 이러한 자료로 볼 때 당시의 생업 활동은 수렵, 채집, 어로, 농경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패총유적들은 해식애가 발달한 동쪽과 서쪽보다는 북쪽과 남쪽에 주로 분포한다. 특히 해안 가까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의 사면이나 산록 완사면에 많은 유적들이 분포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내륙쪽으로도 하천이 흐르는 산록 완사면이 확인되기 때문에 앞으로의 조사에서는 이들 지역에 대한 정밀 조사가 요구된다. 여기에 더하여 나리분지와 그 주변은 섬 안의 유일한 평지와 구릉성 지형임에도 현재까지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어, 좀더 자세한 조사를 통해 이러한 유적 부재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수한 모습의 울릉도식 고분]
국립중앙박물관이 1957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북면의 현포리에서 38기, 천부리에서 3기, 죽암리에서 4기, 서면 남서리에서 37기, 남양리에서 2기, 태하리에서 2기, 남면 사동리에서 1기가 발견되었다. 그후 1997년의 서울대학교 지표조사와, 1998년의 영남대학교 지표조사에서 최소 54기 정도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울릉도 고분은 구조에서 육지와는 다른 특수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명 울릉도식 고분으로 부르고 있는데, 구조는 크게 기단부·석실부·봉석부로 구분된다. 고분 축조 형식을 보면, 기단부가 경사면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고분의 뒷부분에 경사면을 파고 앞부분에 기단을 축조하여 석실 축조면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남서리 고분군과 남양리 고분군, 울릉 현포동 고분군이 대표적인 경우로, 기단부의 축조는 정연하게 쌓아올렸으나 평면 형태는 타원형, 원형, 부정형 등 다양하고 불규칙한 형태를 가진다.
석실부는 울릉도식 고분을 특징 짓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석실은 지상식으로 배 모양[舟形]의 긴 석실을 축조하며 천장의 후위를 낮추는 경향이 있다. 양장벽(兩長壁)은 주로 깬돌[할석(割石)]로 평적하여 내경하게 쌓았는데, 천장이 평천장을 이루게 같은 높이로 쌓은 것이 아니라 입구에서부터 석실 중간까지는 점점 높게 쌓고, 중간부터 석실 끝부분까지는 점점 낮게 쌓았다. 따라서 개석을 덮은 천장의 모습이 장축 방향으로 호선(弧線)을 그리게 되었다.
1963년에 보고된 고분 가운데 크기가 알려진 20기의 자료를 이용해서 석실의 길이를 비교해 보면, 장축의 길이가 5m 이하가 1기, 5~7m에 해당하는 것이 15기, 9~11m에 해당하는 것이 4기이다. 장축과 단축의 비율은 대부분 4대1에서 5대1 정도이며, 8대1 이상이 되는 것도 있다. 대부분의 석실이 세장한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봉석부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다양한 크기의 깬돌을 적석하여 구축하였는데, 남서동 11호분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크기가 다른 자연 암괴를 혼축하여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형태는 부정형이 많으며, 특히 정상부가 평탄면을 이루는 것이 두드러지는데, 개중에는 개석부가 돌출되어 보이는 것도 있다. 따라서 봉석의 형태는 대략 절두원추형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울릉도식 고분은 ‘기단식 적석석실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동해안의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의 구덩식돌덧널[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앞트기식돌방[횡구식석실(橫口式石室)]과도 유사하지만 직접적인 관련이 어렵고 시기적으로도 공백이 있다.
서울대학교 교수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원룡은 1963년의 조사 이후, “낙동강 동안의 삼국시대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과 주체 구조에 있어서 유사하며, 신라 중심지의 묘제가 아니라 가야 지방 묘제와 연결되며, 위의 사실은 우산국이나 주민의 출자가 신라계가 아니라 가야계라는 것을 말한다”고 축조 집단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반해 서울대학교박물관이 내놓은 조사보고서에는 "신라 묘제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울릉도의 설정에 맞게 변형된 것으로 6세기 중엽 이후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하고, "울릉도식 고분이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축조된 것으로, 그 양상으로 보아 울릉도에 진출한 신라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산국의 토착 지배층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토착적인 발전을 거쳤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고고학적 자료만으로 고분의 축조 집단이 토착민인지 이주민인지에 대해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고분의 구조나 형식이 육지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인 토착민들이 외부의 영향으로 발전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육지에서 울릉도식 고분과 유사한 고분 형태나 토기를 가지고 이주한 사람들이 축조하면서 섬 안에서의 독특한 생태적 조건에 적응한 산물로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고분군에도 위계 관계가 있다]
울릉도에서 현재까지 조사 보고된 고분군은 총 10개소 정도로 파악된다. 이들 고분군은 고분군 내에서도 대형분과 중·소형분으로 구분되는데, 각각의 고분군들 간에는 특이하게 위계 관계가 보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사 결과 울릉도에서 가장 큰 고분군으로 밝혀진 울릉 현포동 고분군의 경우, 현포초등학교 부지에서 발견된 대형분과 석주열 유적 등으로 미루어 상대적 위계를 파악할 수 있다. 현포동 고분군에서 출토되어 향토사료관에 전시되고 있는 동관(銅冠) 및 일괄 유물의 존재 등이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울릉 현포동 고분군 다음의 대형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은 울릉 남서동 고분군과 천부리 고분군이다. 울릉 남서동 고분군의 경우 현재까지 발견된 고분 중에서 가장 큰 11호분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고분군의 위계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 당시에도 현포동 고분군에 버금가는 많은 수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천부리 고분군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 당시 대형의 석실묘와 마구류와 같은 유물들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상당히 큰 수준의 고분군으로 판단된다. 그외의 고분군들은 고분군 내에 탁월한 대형묘가 확인되지 않고 고분의 수도 10기 미만 정도이거나 2~3기만 잔존하기 때문에 가장 낮은 위계의 고분군으로 파악된다.
이상과 같이 울릉도의 고분군을 검토해 보면, 현포리를 중심으로 하는 대집단과 남서리·천부리의 중집단, 그리고 나머지 소집단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또한 각각의 소집단들은 중집단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현포리 대집단을 중심으로 위계화된 상태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이 비록 정교하고 치밀한 고분 조사나 부장 유물과 같은 정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고분의 수나 규모만을 가지고 내린 추론이라고는 해도 당시 울릉도 사회가 내부적으로 상당히 위계화된 사회였음을 추론케 한다.
울릉도 사회에서 6세기 중엽 이후 본토의 토기를 꾸준히 수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나름의 독자적인 정치조직이나 기구를 갖추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헌적 해석이긴 하지만, 6세기 무렵 울릉도에는 신라에 공납을 바치고 간접 지배를 받는 정치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결과로 나타나는 고고학적 자료가 바로 울릉도만의 특수한 고분과 토기들이며, 석주열 유적과 같은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