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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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美面-集姓村 |
영어음역 | Haemimyeonui Jipseongcho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
집필자 | 이은우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집성촌.
[개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는 다양한 성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다만 현재에도 조사를 통해 그 유서가 확인된 해미면의 집성촌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입향한 조선 후기의 성씨들이 형성한 마을들이 대부분이다. 해미면에는 대곡리 전주 이씨, 대곡리 경주 김씨, 황락리 여양 진씨, 관유리 전씨[정선 전씨], 언암리 도구머리 김씨[영산 김씨], 응평리 매벌 정씨, 양림리 청주 한씨, 휴암리 죽산 안씨 집성촌 등이 있다.
[명칭 유래]
해미면의 집성촌은 본관과 함께 통상 세거지의 지명에서 유래한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대곡리 이씨(大谷里李氏)는 입향조 이일엽이 해미면 대곡2리에 정착하여 얻은 이름이다. 대곡리 김씨(大谷里金氏)는 입향조 김상학이 홍성의 광천 장곡에서 대곡1리로 이주하여 세거지를 형성하면서 얻은 이름이다. 대곡리라는 지명은 대티와 심곡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을 따서 생성된 지명이다.
황락리 진씨(皇洛里陳氏)는 입향조 진협(陳協)이 인근 신창에서 황락리로 이거하면서 얻은 이름이다. 황락리라는 지명은 황조촌과 일락촌을 병합하여 생겨났다. 도구머리 김씨는 언암리 도구머리에 입향하여 얻은 별칭이다. 도구머리는 언암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바위의 머리 쪽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양림리 한씨(良林里韓氏)는 입향조 한극겸(韓克謙)이 양림리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양림리는 조선 시대 구양릉리라고 불렀던 지명에, 마을에 송림이 많아 합쳐진 지명이다.
휴암리 안씨(休岩里安氏)는 입향조 안원용이 경기도 시흥에서 옮겨와 휴암리에 정착하여 얻은 이름이다. 휴암리는 마을에 있는 바위가 부엉이를 닮아 부엉산[鵂山]이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바로 이 부엉이가 휴식을 취하는 바위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매벌 정씨는 응평리 매벌이라는 곳에 집성촌을 형성하여 얻은 이름이다. 응평리는 땅이 매흙으로 된 벌판이어서 매벌 또는 응평이라 하였고, 혹은 마을 앞들에 매 떼가 날아들었다 하여 매벌이라 했다고도 한다. 관유리 전씨는 관유리에 집성촌을 형성하여 붙은 이름이다. 관유리는 관기리와 하류곡리를 병합한 지역인데, 정선 전씨의 집성촌이 있던 관기리는 옛 관아 터가 있는 지역이라 관기리 전씨라고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대곡리 이씨는 전주 이씨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로, 이일엽이 대곡2리에 입향한 이래 약 250년 동안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전주 이씨 회안대군파는 전주에서 서산시 부석면 강당리로 입향하였다가 광천리와 대곡리 일대에 분파하였다고 전해진다. 20여 호 이상이 거주하였으나 많은 인구가 도시로 이거하였다.
대곡리 김씨는 경주 김씨로, 1800년대 중반에 입향조 김상학이 홍성의 광천 장곡에서 대곡1리로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김상학은 천주교 신자로 1866년(고종 3)에 일어난 병인박해를 피해 서산에서 이곳 골짜기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한말 이후 현대까지 30여 호 이상 거주하였지만 현재는 5~6호만이 남아 있다.
황락리 진씨는 여양 진씨 첨정공파(僉政公派)로, 입향조 진협[1696~1769]이 1700년대 초 황락리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한말 이후 마을에는 20여 호가 거주하였지만, 현재는 3~4호만이 남아 있다. 도구머리 김씨는 영산 김씨(永山金氏)로, 언암리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997년 언암리에 서산전투비행장이 들어서면서 도구머리 김씨 집성촌은 완전히 해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양림리 한씨(良林里韓氏)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한극겸이 양림리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한편 청주 한씨는 그 이전에도 한극겸의 아버지 한효순(韓孝純)[1543~1621]이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에 연루, 파직되어 해미면 양림리로 은거한 인연이 있었다. 원래 이 일대에 청주 한씨 선대가 사패지로 하사 받은 땅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한효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성연면 예덕리 덕천마을로 이거하여 완전히 정착하였다. 청주 한씨 집안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한효순은 집안에서 경영하던 사패지를 아들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때 여섯째 아들 한극겸이 해미면 양림리로 분파하여 정착하게 된 것이다. 한극겸은 낙향한 후 작은 농사(農舍)를 짓고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의 위치는 행정 구역 상으로 해미면 기지리 489번지이다. 근대 이후 집성촌의 전성 시기에는 120~130여 호가 거주할 정도로 번창하였다가, 현재는 20여 호가 남아 있다.
휴암리 안씨(休岩里安氏)는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입향조 안원용이 1900년대 중반 경기도 군포에서 이거하여 휴암리에 정착하면서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현재는 2가구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해미면에는 18세기 전반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되는 매벌 정씨[응평리]와, 여말 선초에 입향하였다고 전해지는 관유리 전씨[관유리] 등의 집성촌이 있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집성촌이 해체된 상태이다.
[자연 환경]
해미면은 북서 방향으로 흐르는 해미천(海美川)과 남서쪽으로 흐르는 반양천(磻陽川)을 비롯한 여러 하천이 흐르고 하천 주변에 비교적 넓은 충적지가 발달되어 집성촌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대곡리 이씨, 대곡리 김씨의 집성촌이 위치한 대곡리는 가야산(伽倻山)과 연암산(燕岩山)이 마주한 곳에 자리한 산촌 마을이다. 골짜기와 고개가 발달하였으며 마을 앞으로 대곡천이 흐른다. 황락리 진씨 집성촌이 있는 황락리는 일락산(日樂山) 기슭에 자리하는데 마을 앞으로 황낙천이 흐르고, 황낙저수지가 축조되었다. 관유리 전씨 집성촌의 관유리 남쪽에는 홍천천이 길게 흐르며, 넓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도구머리 김씨 집성촌의 언암리는 당미봉 등과 같은 낮은 구릉이 있을 뿐 대체로 평탄한 지형이다. 때문에 넓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어 집성촌이 형성될 만한 조건을 갖추었다. 마을 서남쪽에 삼도저수지가 자리한다. 매벌 정씨 집성촌이 위치한 응평리는 동북쪽으로 해미천이 흐르는 농촌 마을이다. 매벌이라는 지명처럼 원래 토질이 척박하여 농사짓기가 어려운 곳이었다고 전하나, 개간 사업 등으로 농경지를 새롭게 구축하였다. 이외에 양림리와 휴암리 일대도 모두 하천을 이용한 넓은 농경지가 형성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현황]
현재 해미면의 대부분의 집성촌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거의 해체되었다. 양림리 한씨 집성촌을 제외한 대부분의 집성촌은 젊은 세대가 다른 지역으로 전출하여 현재 각각 약 5가구가 채 안되게 남아 있다. 특히 도구머리 김씨나 매벌 정씨 집성촌의 경우에는 마을 내 서산전투비행장이 설립됨으로써 집성촌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현재 해미면의 집성촌 중에서 가장 많은 가구 수를 지닌 마을은 양림리 한씨로 아직도 20여 가구가 남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