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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06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해준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 시기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행정 구역]

조선 시대 서산 지역은 서로 독립적인 행정 구역이었던 서산군해미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서산군해미현은 독자적인 역사 문화적 배경과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서산군은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이었으나 통일 신라 때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쳐졌다. 이어 고려에 들어서도 그대로 이어지다가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서주목(瑞州牧)-서령부(瑞寧府)-지서주사(知瑞州事)를 거쳐 조선조인 1413년(태종 13) 서산군(瑞山郡)으로 고쳐졌다. 해미현은 조선조인 1407년(태종 7)에 정해현(貞海縣)여미현(餘美縣)을 합쳐 해미(海美)로 하고, 1413년에 현감으로 고쳤다. 딸린 부곡(部曲)은 유솔(有率)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여지도서(輿地圖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서산 지역의 호수(戶數)와 남녀 인구가 기록되어 있다. 우선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서산군은 호수 489호, 인구 1,887명이고 해미현은 호수 258호, 인구 855명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는데 『여지도서』에 의하면 당시 서산군은 총 6,620호에 남자 1만 1122명, 여자 1만 3636명이었다. 해미현은 총 2,591호에 남자가 4,185명, 여자가 4,776명이었다. 이로부터 30년 지난 기록인 『호구총수』에는 서산군은 호수 6,823호에 남자 1만 3176명과 여자 1만 4961명, 해미현은 호수 2,763호에 남자 4,494명과 여자 5,204명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산 지역에도 특수 행정 구역으로 향·소·부곡이 설치되어 있었다. 서산군에는 인정부곡(仁政部曲), 정소부곡(井所部曲), 성연부곡(聖淵部曲), 광지향(廣地鄕), 안면소(安眠所), 화변소(禾邊所), 위소포, 조립부곡(助立部曲)이 있었다. 그리고 해미현에는 몽웅향(夢熊鄕), 사곡소(寺谷所), 염솔부곡(鹽率部曲), 소당부곡(炤堂部曲), 염정부곡(鹽貞部曲)이 있었다.

[정치·군사]

정치·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 시대 대표적인 시설로는 산성·읍성과 진(鎭)을 들 수 있다. 서산군에는 서산읍성과 파지도영 성곽(波知島營 城郭)[1516년 축성]이, 해미현에는 해미읍성이 있었다. 1397년(태조 6) 각 도에 2~4개의 진이 설치되어 첨절제사가 부근 군현의 병마를 총괄하였는데,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에는 충청도 3개 진 중의 하나인 순성진(蓴城鎭)이 있었다. 순성진은 축성되었을 당시 높이 6자, 둘레 1,353자였다.

또한 서산시 대산읍의 대산곶에 평신진(平薪鎭)도 있었는데, 평신진에는 수군첨절제사겸 총리영둔아병파총(水軍僉節制使兼摠理營屯牙兵把摠)을 두었다. 그리고 조선 전기 충청도 수군은 수(戍)를 기반으로 모두 7개의 만호진(萬戶鎭)이 설치되었는데, 서산에는 고파지도수(古波知島戍)[서산시 팔봉면 고파도리]와 요아량수(要兒梁戍)[현 충청남도 태안군 고남면 고남리 영목]가 있었다.

[교통·통신]

조선 시대에는 육상 운송을 위한 역원(驛院)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통신을 위한 봉수제(烽燧制)도 실시되었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는 대략 12㎞[30리]마다 역을 두고 말을 제공하며 진상 등의 관물 수송까지도 담당하였다. 조선 시대 서산군에는 풍전역(豐田驛), 득웅역(得熊驛)이 있었고 행인의 편의를 위해 냉정원(冷井院)·저지원(猪旨院)·망현원(芒峴院) 등의 원이 있었다. 해미현에는 몽웅역(夢熊驛)과 신당원(神堂院)이 있었다.

한편 봉수 제도는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설치된 통신 수단이었다. 봉수대는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횃불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횃불 3개,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횃불 4개, 전투가 벌어지면 횃불 5개로 각각 신호하였다. 서산군에는 북산봉수도비산봉수가 있어 북쪽으로 해미현의 안국산봉수로 이어져 서울로 전달되는 구조였다. 해미현의 안국산봉수는 북쪽으로 당진현의 고산과 호응하여 서울로 연결되었다.

[경제·사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선 전기부터 서산군 지곡 지역의 은광 발견과 관련된 기록이 확인된다. 기록에 의하면 서산 지곡은 은이 생산되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은을 제련하기에도 알맞은 지형으로 조정에서 전략적으로 은을 캐도록 결정했다고 한다. 이후 이 은광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서도 개발되었고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개발이 지속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서산군은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며 간전(墾田)이 7,283결, 토의(土宜)는 벼·기장·피·조·보리·메밀·모시·삼·칠, 토공(土貢)은 시우쇠·지초·잡깃[雜羽]·족제비털·여우가죽·삵괭이가죽·표범가죽·참가사리[細毛]·황각(黃角)·숭어·민어·홍어·상어·큰새우[大蝦], 약재(藥材)는 병풍나물뿌리[防風]·오징어 뼈, 토물(土物)은 굴[石花]·낙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어량(魚梁)이 10개소, 염소(鹽所)가 1개소, 철장(鐵場)이 1개소, 자기소(磁器所)가 1개소, 도기소(陶器所)가 1개소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미현 역시 서산군과 마찬가지로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며 간전(墾田)이 2,763결, 토의(土宜)는 오곡과 메밀·모시·삼·칠·닥나무, 토공(土貢)은 지초·감·참가사리[細毛]·족제비털·잡깃[雜羽]·자리·숭어·민어·어교(魚膠)·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山獺皮]·수달피(水獺皮), 약재(藥材)는 쪽·칠(漆)·백출(白朮)·버들옷[大戟], 토산(土産)은 굴[石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어량(魚梁)이 1개소, 염분(鹽盆)이 1개소, 도기소(陶器所)가 2개소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서산 지역의 성씨에 관한 기록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서산군의 경우 토성(土姓)은 유(柳)·송(宋)·두(杜)·문(文)·전(全)이다. 촌성(村姓)은 방(房)이고, 속성(續姓)은 박(朴)이다. 지곡(地谷)의 성은 안(安)·이(李)·문(文)이고, 촌성이 박(朴)이다. 없어진 복평향(福平鄕)의 속성(續姓)은 유(柳)이고, 없어진 광지향(廣地鄕)의 속성은 염(廉)이고, 없어진 안면소(安眠所)의 성은 유(柳)이다. 없어진 화변소(禾邊所)의 속성이 유(柳)·송(宋)이요, 없어진 인정부곡(仁政部曲)의 속성이 이(李)요, 없어진 조립부곡(助立部曲)의 속성이 나(羅)요, 없어진 성연부곡(聖淵部曲)의 속성이 김(金)·하(河)이다.

해미현의 경우 토성은 백(白)·한(韓)·구(仇)·윤(尹)이다. 없어진 사곡소(寺谷所)의 성은 염(廉)·한(韓)이다. 여미현(餘美縣)의 성은 곽(郭)·박(朴)·명(明)·여(余)이고, 없어진 염솔부곡(鹽率部曲)의 성은 박(朴)·명(明)·여(余)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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