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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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相愚 |
영어음역 | Jo Sangwoo |
이칭/별칭 | 자직(子直),동강(東岡),효헌공(孝憲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오생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봉희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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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오생리 |
성별 | 남 |
생년 | 1640년 |
몰년 | 1718년 |
본관 | 풍양 |
대표관직 | 좌의정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직(子直), 호는 동강(東岡). 예조판서 조형(趙珩)의 아들이며, 할아버지는 승지 조희보(趙希輔)이다.
[활동사항]
조상우는 1657년(효종 8)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연천현감(連川縣監)을 지냈다. 1675년(숙종 1)에는 스승인 송준길(宋浚吉)이 삭직을 당하자 홍득우(洪得禹)와 함께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남평(南平)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호조좌랑(戶曹佐郞)·태인현감(泰仁縣監)을 거쳐 43세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이듬해 지평(持平)을 거쳐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개성유수(開城留守)·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형조·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지냈고 1711년(숙종 37)에 좌의정이 되어 세제(稅制)의 폐단을 시정하여 민생의 어려움을 해소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던 학자로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학문과 사상]
이경석(李景奭)·송준길의 문인으로서, 학자로서 지조와 절개를 갖추었던 문신이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여러 분야의 학문적 소양을 지녔던 인물로 보인다.
[저술 및 작품]
조상우는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글씨로 회덕(懷德)에 있는 충현서원(忠賢書院) 사적비(事蹟碑)와 이지걸(李志傑)의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효헌(孝憲)이며 유배지였던 남평(南平)의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