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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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珩 |
영어음역 | Jo Hyeong |
이칭/별칭 | 군헌(君獻),취병(翠屛),충정공(忠貞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오생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봉희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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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
성별 | 남 |
생년 | 1606년 |
몰년 | 1679년 |
본관 | 풍양 |
대표관직 | 좌참찬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군헌(君獻), 호는 취병(翠屛). 승지(承旨) 조희보(趙希輔)의 아들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조상우(趙相愚)는 그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조형은 어려서 장난이 심하였으나 일찍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9세에 경서(經書)를 해득하여 세상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1630년(인조 8)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고, 2년 후 인조의 부친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를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려는 데 반대하여 충청도 부여로 귀양 갔다.
4년 후 복직되었고 문신전(文臣殿)에서 『역학의해(易學義解)』를 설명하는데 유창하게 잘하여 영상(領相) 김류(金瑬)가 극구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1636년(인조 14)에 청나라의 침입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갈 때 호종(扈從)하여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다음 해 환궁하여 병조정랑이 되고 경상도 영덕에 나갔을 때 군량미를 거두어들이는 등의 여러 정사(政事)에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그 후 부교리(副敎理)·응교(應敎)·부수찬(副修撰)을 거쳐 헌납(獻納)이 되었다. 1650년(효종 1)에는 집의(執義)로서 춘추관수찬관이 되어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다음 해에는 청나라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왔고, 1655년(효종 6)에는 대사간이 되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어서 병조참판·경기도관찰사·예조판서·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우참찬, 좌참찬을 지내다가 1674년(숙종 즉위)에 복상(服喪) 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 논쟁이 일어나자 서인(西人)으로서 9개월 복상인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다가 양주(楊州)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풀려나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가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일찍부터 한학에 조예가 깊어 문신전에서 『역학의해』를 설명하는 데에도 막힘이 없었다. 또한 학문적 소양으로 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청나라에 사은사,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는 등 활약하였다. 또한 인조의 부친 추숭(追崇) 문제나 예송 논쟁에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는 소신 있는 학자였다.
[묘소]
처음에는 유배지였던 양주에 묘소가 있었으나 나중에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오생리로 이장하였고 묘 옆에는 최석정(崔錫鼎)이 찬한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철조(綴朝)하여 조의를 표하고 부의(賻儀)와 제문(祭文)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