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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남원양민 학살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2587
한자 美軍南原良民虐殺事件
영어음역 Migun Choechoui Namwon Yangmin Haksal Sageon
영어의미역 First American Massacre of Civilians in Namwon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병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양민 학살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45년 11월 17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45년 11월 17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남원경찰서[구소방서 남쪽 옆]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한성배[18세]|박병갑[18세]|김철옹[33세]

[정의]

1945년 11월 17일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미군이 양민을 학살한 사건.

[개설]

미군 남원양민 학살사건은 해방 정국에서 미군에 의해 최초로 일어난 한국 양민 학살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16일에는 건국청년치안대가 조직되었으며, 22일에는 중앙부서가 12부 1국으로 확대, 개편되어 광복 한국으로 순탄한 정부조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9월 7일 미군은 남한 상공에 38도선 이남의 ‘점령’에 관한 포고 1호를 뿌렸다. 주요 내용은, 맥아더가 최고 통치·입법·행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으며, 남한 주민은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발단]

미군은 1945년 10월 24일 남원에 진입하였다. 미군정 64군정대였다. 이때까지도 일본군은 완강하게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있었으나, 남원에서는 이미 9월 초 남원인민위원회와 청년동맹, 건국준비대가 절반 이상을 무장해제한 뒤 150자루의 소총을 일본군으로부터 인수받아 치안 유지에 임하면서 경찰 기능 행사와 적산관리 운용을 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가장 앞서고 발빠르게 대처한 것이다.

그러나 남원에 진입한 미군은 적산은 미군정에 귀속하니 내놓으라고 강압하였고, 인민위원회로 바뀐 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재산양도 증명서를 내놓으며 거부하였다.

무장한 경관 20명을 이끌고 11월 15일 오후 2시 남원에 도착한 전북경찰국장 김응조는 인민위원회와 건국군·청년동맹의 해산을 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거부한 인민위원 김창한·양판권·강홍주·박종암·노무룡 등 5명을 검속하여 전주로 압송하려 하자, 이에 격분한 군민 1백여 명이 뒷밤재에서 김응조를 응징하고 권총을 빼앗았다.

[경과]

같은 날 저녁 늦게 미군의 추가 병력이 남원에 파견되었고, 16일에는 16명의 군민이 미군에게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격분한 남원군민은 17일 오후 1시 남원경찰서(구소방서 남쪽 옆) 앞으로 집결하였는데, 약 4천여 명이 운집하여 시위에 돌입하였다.

1시간 이상 대치 상태가 지속되자 미군은 2분 이내에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고, 이를 거부하며 한 청년이 웃옷을 벗고 미군 앞으로 나가자 군중은 박수와 함성으로 응원하였으나 미군은 이 청년에게 발포하여 현장에서 숨지게 하였다.

이어지는 사격으로 현장에서 두 명이 더 숨지고, 7~8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자리에서 사망한 사람은 한성배(18세, 이백면 남계리), 박병갑(18세, 산동면 부절리), 김철옹(33세, 주소 미상)이다. 미군이 이 땅에 진주하여 행한 최초의 양민학살이었다.

[결과]

박병갑은 마을 청년들에 의하여 산동면 태평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만든 신사에 묻혔는데, 미군 학살 당시 동행하여 현장에 있었던 박병태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한성배는 매형 윤재봉에 의하여 요천의 청룡사 입구에 묻혔다가, 1997년 4월 전교조 남원지회의 추적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1997년 4월 19일 전교조 남원지회(당시 지회장 한병옥)에서 두 무덤에 목비를 만들어 세우려 했으나, 박병갑의 인척들이 반대하여 한성배의 묘에만 목비를 세우고 박병갑의 목비는 지금도 보관 중이다. 박병갑의 친척들이 반대한 이유는, 그 동안 연좌제에 걸려 직계도 아닌 일가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거부감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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