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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2579
영어음역 Ppalchisangwa Jirisan
영어의미역 Partisan and Jirisan Mountain
이칭/별칭 야산대,인민유격대,남부군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정만

[개설]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지리산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 지리산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은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자행된 살육과 약탈에서 보면, 빨치산이든 국군·경찰이든 모두 피해자였다. 또한 누대로 지리산 자락에 삶의 터전을 잡았던 무고한 주민들이 입은 인적·물적 피해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은 평화와 용서 그리고 화해가 민족사의 화두가 되었고, 남북 공존과 평화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시기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세기 전에 왜 우리가 지리산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또한 반세기 전에 지리산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용서와 화합으로 승화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한국전쟁 이전 빨치산의 태동과 지리산]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이 삼천리 한반도를 달려 반도의 남쪽에 용트림하여 우뚝 솟아 깊고 광대하며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언제나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감싸고 품어 왔다.

왕조의 권세가들이 민중을 핍박하거나 외세의 침략이 끊이질 않을 때 민중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최후의 저항을 펼쳤던 것은 지리산이 그만큼 깊고 넓어 투쟁과 생존의 기본 조건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리산은 우리 민족에게 단지 높고 큰 산만의 개념이 아니라 민중의 이상향을 실천할 수 있는 낙원이요, 또한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고 식민 정책을 막 폈을 때,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투쟁한 의병들이 지리산실상사로 들어와 일본군과 싸웠던 이야기가 지금도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일대에 사는 촌로들을 통해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지리산은 이른바 빨치산이 지리산을 무대로 투쟁하기 전에도 이미 반제국주의 타도의 주요한 거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빨치산(partisan)’이라는 말은 프랑스어 ‘파르티(parti)’에서 유래하였는데, 파르티란 도당·동지로 해석된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과 동의어인 게릴라(guerrilla)라는 말이 보다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어쨌든 한국의 현대사에서 빨치산이라는 뜻은 일반적으로 한국전쟁 전후에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를 타도하여 공산주의 인민공화국을 건설할 목적으로 지리산을 대표로 하는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던 좌익 집단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빨치산 활동은 일제시대부터 있었다. 일제 말기에 일단의 애국지사들이나 징병과 징용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던 젊은이들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빨치산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좌익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훗날 지리산 빨치산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이현상이 해방 전부터 지리산을 은신처로 일제와 투쟁한 것은 이러한 지리산의 환경적 특징으로 볼 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지리산에 빨치산들이 조직적으로 은거하여 유격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결정적 동기는 이른바 여순 반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 경, 여수 주둔 제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 짐지회 등의 좌익계 군인들이 제주도 폭동 진압에 출동을 거부한다는 표면적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약 3천 명의 반란군들은 지방 남로당 당원들의 지원을 받고서 일시에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인근 학구, 광양, 벌교 등 세 방면으로 진격하여 22일 아침에는 지리산 자락의 구례와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반란군과 남로당 당원들은 지서, 관공서 등을 습격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 간부, 우익 인사, 지주 등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여 당시 전라남도 남동부 지역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당시 14연대의 반란에 놀란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광주에 황급히 반란군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난 뒤, 전투사령관 송호성이 지휘하는 군대가 진압 작전을 벌였다. 10월 23일 반란군에 대한 토벌 작전이 성공하자 14연대 반란군 패잔병들은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광양의 백운산과 지리산의 문수골, 화엄사계곡, 산청 근처의 웅석봉 등지로 숨어들어 본격적인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김지회가 이끄는 여순 반란 사건의 패잔병들이 지리산에 입산한 시점부터 지리산과 빨치산의 운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김지회가 이끄는 패잔병들은 1948년 10월 25일 지리산 문수계곡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난 뒤 함양·하동·순천·구례·남원 등지에 출몰하여 경찰서를 습격하고 우익 분자를 죽이고 지주의 집을 약탈하였으며 산간 지역에 유격전구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49년 4월 9일 국군은 뱀사골 반선 지역에서 김지회 부대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그들을 모두 섬멸하였다.

당시 김지회가 이끈 패잔병들은 약 1천여 명 정도 되었는데, 반선 전투에서 김지회·홍순석 등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사살되고 패잔병들이 괴멸했을 때 남은 패잔병들은 약 2백여 명이었다. 군경에 쫓긴 이들은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 지리산 일대의 남로당 세력과 연계하여 이른바 지리산유격대를 결성하였다.

한편 구례 유격대장 박종하는 여수·광양·구례의 유격대를 규합하여 백운지구사령부유격대를 조직하였는데, 총인원 50명, 무장 13정이었다. 1949년 6월 하순 박종하는 50여 명의 병력으로 광양군 진상면 신항리에 주둔 중이었던 국군의 15연대 중화기 중대를 기습하여 박격포 2문과 기관총 5정, 소총 70여 정, 실탄 수만 발을 노획하여 대부대로 약진했다.

1949년 9월 박종하는 또 15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광양읍 서국민학교에 주둔 중인 15연대 1개 대대 병력을 공격하여 포로 6백여 명과 소총 7백여 정 등 대대 병력 보급품 전부를 노획하는 유격 투쟁사상 초유의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14연대 반란군의 정치위원이었던 이현상은 박종하 부대를 지리산으로 불러 14연대 출신의 패잔병들과 세력을 합쳐 지리산인민유격대로 재편성하여 박종하를 총참모장으로 기용하여 그에게 빨치산 투쟁의 지휘권을 맡겼다.

그들은 지리산에서 지서를 습격하고 보급 투쟁을 전개하면서 무기 수리와 폭탄 제조 공장을 운영하였으며, 또 지리산 일대의 해방지구에서는 등사판을 이용하여 신문과 각종 인쇄물을 발행하여 빨치산과 지리산 자락에 거주하는 양민들에게 배포하는 등 선전 활동도 병행했다.

그들이 이처럼 지리산 유격 투쟁의 초기에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산간 주민들의 동조와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양민들은 빨치산들이 실시한 토지 개혁에 크게 고무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했다고 생각한다. 또 당시 북한에서 남한의 빨치산을 지원할 목적으로 파견한 이른바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남파유격대’의 일부가 지리산까지 내려와서 지리산 빨치산의 유격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리산 빨치산은 1950년 1월에 산청군 화개면에서 국군 70여 명을 기습하여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국군과 경찰은 추위를 이용하여 민간 부락과 빨치산의 통로와 소통을 차단하고 난 뒤 본격적으로 토벌 작전을 단행하였다. 빨치산들은 혹독한 추위에 보급로가 끊긴 채 군경의 토벌 작전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1950년 6월 초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더 이상 유격 활동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잔여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월북을 결심했다. 그들이 군경의 포위망을 뚫고 지리산을 떠나 북상 중 무주에서 인민군이 38선을 무너뜨리고 남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현상은 대전에 가서 인민군전선사령관 김책을 만났는데 김책은 그에게 후방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현상은 즉시 유격대를 이끌고 다시 남하하였는데, 이때부터 빨치산의 투쟁과 운명은 다시 한 번 바뀌게 되었다.

[한국전쟁 중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활동]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총공세를 시작한 북한의 인민군은 이른바 ‘남조선 해방’의 목표 아래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 김일성은 전쟁이 터진 직후 평양방송을 통해 해방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남북조선 인민들이 총궐기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빨치산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게! 유격 운동을 한층 맹렬히 더욱 용감히 전개하며, 해방구를 확대하며 또는 창설하며 적은 후방에서 적들의 공격, 소탕하고 적의 작전 계획을 파탄시키며 (중략) 각종 수단을 다하여 적의 전선과 후방 연락을 차단하고 도처에서 반역자들을 처단하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고 인민 군대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김일성이 남침 전쟁을 일으킨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에서 유격 투쟁하던 빨치산과 좌익 계열의 민중들이 즉시 후방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여 북에서 남으로 진군하는 인민군을 도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전쟁 초기에 빨치산의 활약에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어쨌든 전쟁 초기에는 김일성의 생각대로 빨치산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낙동강까지 진격하는 과정에서 인민군과 협동 작전을 벌이거나 무장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 16개 국가의 신속한 참전과 한국군의 낙동강 전선에서의 성공적인 방어는 점차 한국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인민군은 남북으로 포위된 채 북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퇴로가 막힌 일부 인민군, 인공 치하에서 활동한 좌익 등의 세력이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기존의 빨치산들과 연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 기간 동안 본격적인 빨치산 투쟁이 시작되었다.

1949년 하반기에 인민유격대 2병단을 편성하여 무장 투쟁을 벌여오던 이현상 부대는 인민군의 남진과 함께 낙동강 전선에서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 활동을 하다가 인민군이 퇴각하자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백두대간을 타고 북으로 올라갔다. 1950년 11월 이현상이 부대를 이끌고 강원도 후평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인민군과 유격대를 편성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승엽과 함께 이른바 남조선인민유격대, 속칭 남부군을 창설하였다.

이때 이승엽은 이현상을 남부군 부대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즉시 남으로 내려가 유격 활동을 벌이도록 명령했다. 이현상의 남부군은 과거에 동학 혁명군의 집결지이기도 했던 보은군 마로면 갈평이라는 산마을에 2개월 남짓 머무르면서 청주를 비롯하여 문경경찰서 등 각급 기관을 기습했다. 1951년 4월 말 남부군 예하의 결사대 48명이 청주를 습격했다.

그들은 충북도청, 청주경찰서, 청주형무소 등 주요 기관을 일시에 점령한 뒤 수감 중이던 좌익계 죄수들을 풀어내 속리산으로 철수하였다. 한국전쟁 중 빨치산이 도청 소재지를 공격하여 한때나마 점거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남한의 빨치산은 지리산 이현상 부대 1백여 명을 비롯하여 모두 460여 명이었던 것으로 국방부는 추정하고 있다. 이는 제주 4·3항쟁과 여순 반란 사건의 초기 진압으로 숫자가 크게 줄어든 탓이었다.

하지만 인민군이 퇴각한 후에는 38선 이남에만 1만여 명이 넘는 빨치산들이 산중에 은거하여 제2전선을 형성하였다. 빨치산들의 세력이 이처럼 커지자 이승만 정부에서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후방 지역 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여 1950년 10월 중순부터 조직적인 빨치산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1951년 7월 이현상은 남원시 산내면 논골에서 제2차 6개도당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 회의를 통해 각 도당 유격사령부를 사단으로 승격 개편하고 이를 그가 직접 지휘하는 남부군사령부 통제 하에 넣었다. 이때부터 남한 빨치산 세력의 지휘 체계가 이현상을 정점으로 단일화된 것이다.

남부군은 국군과 유엔의 공세에 대항하여 각 도당 빨치산을 통일된 지도 체제에 묶어 무장 투쟁을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전남 도당의 경우는 남부군의 통제에 들어갈 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벌였다. 남부군은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조개골에 거점을 두고 무장 부대를 지휘했다.

이처럼 남한 지역에서 빨치산 부대들이 남부군을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있을 때, 북한은 인민군의 재침입과 발을 맞춰 남한의 유격대가 제2전선의 역할을 수행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즉 각 도당 조직들을 군사 활동을 위주로 한 지대로 개편하도록 했다. 도당위원장이 지대장 또는 정치부 지대장이 되어 인민군의 진격에 호응하는 유격 투쟁을 벌이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대 개편의 지시는 당시 열악한 통신 수단 때문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1951년 4월 23일 북에서 지대 개편 지령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423부대를 조직하여 내려 보냈으나, 충청북도 속리산에서 충북도당 부위원장인 송명현에게 전달된 지령이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거의 동년 10월이 되어서였다. 따라서 이현상이 남부군을 해체하고 4지대로 개편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한편 한국전쟁은 1951년 중반에 접어들자 남과 북이 38선에서 일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며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동년 7월 7일부터는 휴전 회담도 시작되었다. 이에 조선노동당은 남한 지역에서 제2전선 역할을 수행하던 빨치산 유격대 체제를 당 사업을 위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1951년 8월 1일 노동당은 중앙정치위원회를 열고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 당 사업과 조직에 대하여”라는 94호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 94호 결정서에서는 지금까지의 빨치산 투쟁을 평가하고 지구당으로의 개편을 지시했다. 하지만 중앙당 정치위원회의 결정서는 당시 별다른 연락 수단이 없었고 효과적 통신 유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빨치산들에게 즉시 전달되지 못하였다.

1952년 중반에 이르러서야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다. 94호 결정이 가장 늦게 전달된 곳은 이현상이 통제하고 있던 지리산이어서 제5지구당은 1952년 10월에 비로소 조직되었다. 제5지구당 구성을 위한 회의에서 이현상은 김삼용이 중앙당의 결정대로 제5지구당을 만들어 각 도당을 해체하고 소지구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박영발과 방준표는 중앙당의 지시가 정식 문건이 아니며 도당을 해체하라는 것은 중앙당이 남한 실정을 모르고 결정한 것이라 반대했다. 결국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하고 중앙당의 지시와는 달리 도당이 해체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5지구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위원장으로는 이현상이, 부위원장에는 박영발이 선출되었다.

당시 38선에서 북한의 인민군, 중공군과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던 이승만 정부로서는 무엇보다도 후방의 안정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1951년 11월 26일 정부는 전라북도 남원에 백야전사령부를 설치하였는데, 사령관은 한국전쟁 중 최고의 야전 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뽑히는 백선엽 장군이었다.

백야전사령부의 예하 부대로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비롯하여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등의 3개 사단과 태백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 지리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 등의 4개 전투 경찰 및 7개 전투경찰대대 등 전체적으로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빨치산 소탕 작전에 나섰다. 1951년 12월 초 제1기 작전이 개시되었다. 제1기 작전은 지리산 속에 갇힌 빨치산들을 토끼몰이식으로 포위, 압박함으로써 지리산 근거지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12월 19일부터 시작된 제2기 작전은 지리산 외곽 거점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952년 1월 15일부터 시작된 제3기 작전은 지리산을 재차 포위, 공격함으로써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선엽의 야전전투사령부는 이전의 부대와는 달리 탁월한 전투 역량을 바탕으로 군경 합동 작전을 겨울에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지리산에 있던 빨치산들은 추위와 기아 그리고 무기의 절대적 열세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빨치산은 기본적으로 보급 투쟁으로 연명하는 데, 토벌군은 이를 막기 위하여 산간 마을, 심지어 사찰까지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또한 깊숙한 외딴 산간 마을 입구에는 토벌군 매복조가 잠복하거나 봉쇄선을 쳐놓고 대비하였다. 그 중에서도 1월 17~18일이 최대 격전기였다.

그 해 1월 한 달 동안 백야전사령부의 토벌 공세를 피해 궁지에 몰린 빨치산 부대는 야간을 이용하여 빗점골·거림골·신흥 등지에 있던 빨치산이 대성골로 집결하였다. 이곳이 지리산 계곡 중 가장 깊은 협곡인데다가 지세가 험난해 도피하기엔 적합한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토벌대는 신속히 정보를 입수하고 모든 도로를 차단시켜 오직 대성골로 가는 길만 터놓았다. 그리고 수도사단은 대성골에서 무려 10일 동안 엄청난 공세를 가했다. 대성골은 5일 밤낮을 불길에 휩싸였다. 지리산 자락에 살던 사람들은 그때의 불을 하늘에서 떨어진 천불이라고 했다.

수도사단은 빨치산 부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빨치산들은 토벌군의 공격에 쫓기며 추위와 굶주림의 고통을 견디며 눈 속에서 밤낮 없이 숨어 있거나 쫓겨 다니는 일이 전부였다. 공격이 뜸하면 한 웅큼의 쌀과 바위 틈새에서 떨어지는 물로 겨우 연명하였다. 결국 대성골 전투에서 1천여 명의 빨치산들이 섬멸되었다.

훗날 육군본부의 자료에 의하면, 백선엽의 토벌 결과 5천 8백여 명이 사살되고 5천 7백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심각한 타격을 입은 빨치산은 거의 괴멸 상태로 치달았다. 그들은 총에 죽고, 병에 죽고, 얼어서 죽고, 굶어 죽어갔다. 매년 겨울을 보낼 때마다 빨치산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활동 영역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을 때 사실상 빨치산의 주력은 와해되어 있었다.

[휴전 후 빨치산의 최후]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판문점에서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은 휴전이라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상한 전쟁으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지리산 일대에 모든 총성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백선엽의 토벌 작전이 빨치산을 거의 괴멸시켰지만, 이현상을 중심으로 하는 빨치산의 핵심 세력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로서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1953년 9월 21일 전투경찰대 2연대 2대대가 남원 아영지서 경찰대와 합동 작전으로 빨치산 제5지구당 문남호(본명 오복덕)를 생포했는데, 그는 이른바 ‘빗점골 회의’에서 이현상 몰락을 결정한 제5지구당 결정서 9호와 10호를 소지하고 있었다.

먼저 1953년 8월 6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열린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서 9호는 반당·반국가적 파괴 암해 분자, 종파 분자인 박헌영과 이승엽 반역 도당의 잔재와 영향을 근절 청소하기 위하여 제반 대책을 다룬 것이었다. 지도부의 불합리한 조직 체제 운영과 각 도당 단체들과 유격부대들에게 사상적, 조직적 혼란과 전투력 약화를 가져온 책임을 이현상에게 돌린 것이었다.

이현상은 제5지구당 위원장이라는 직책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자신을 겨냥한 이 같은 자아 비판 요구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시 한창이던 북한에서의 남로당계 숙청이 남한의 산중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때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 사실 이현상의 몰락은 곧 남부군의 파멸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현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죽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빨치산 제2병단장, 남부군 사령관, 조선노동당 제5지구당 위원장을 지내면서 남한 내 빨치산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는 여순 반란 사건 때 반란군을 지리산으로 이끌고 간 뒤 1953년 9월까지 만 5년 동안 지리산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을 잡지 않고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했다고 할 수 없다. 죽은 이현상이 아닌 산 이현상을 생포하여 데려오라.”고 말하며 군경의 간부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현상의 사살에 대하여 합동 토벌 작전에 참가했던 국군 소속의 남부지구 경비대사령부와 경찰 소속의 서남지구 전투경찰대사령부 간의 공로 다툼은 유명하다. 결국 군경 합동 조사단이 파견되기도 했는데, 관계 경찰은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국군은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결국 국군은 이현상을 사살하고 경찰이 그 시체를 확보한 것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하지만 최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호위병 출신인 김영태(金永泰)[70세]는 “이현상 사령관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토벌대에 의해 사실된 것이 아니라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현상이 죽고 난 뒤에도 빨치산들은 장기적인 활동을 고려하여 사상 무장을 강화하고 부대를 소규모로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1953년 9월에 들어 지구당은 소규모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빨치산은 주로 지리산 지구, 덕유산 지구, 회문산 지구, 형제봉 지구, 모후산 지구, 전남동부 지구, 영광, 장흥 지구, 운장산 지구에서 활동하였다. 이에 따라 군의 작전도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등 빨치산의 근거지를 공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54년 2월 지리산 지구에는 조국출판사, 지리산주재당, 경남도당, 중부소지구당, 남원 임실군당, 995부대, 727부대, 야지공작대, 이영회 부대가 있었다. 덕유산 지구에는 전북도당 남부지도부, 순천군당, 김제군당, 정읍군당, 고창군당, 부안군당이 있었다. 백아산 지구에는 전남서부도당, 백아산 지구당, 광주시당, 곡성군당, 곽용철 부대가 있었다. 화학산 지구에는 전남남부주재당, 두봉산소지구당, 중부지구 기동대가 있었다. 운장산 지구에는 복수 연대가 있었다.

1954년 2월부터 3월 말까지 전투사령부의 작전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빨치산의 부대장, 위원장 등의 많은 지휘관들이 전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빨치산은 다시 조직적 편제를 시도하게 되었고 1954년 4월경에 이르면 지리산에는 925부대·727부대·남원군당 등 8개 부대가, 백운산에는 전남도당·향미연대가, 덕유산에는 전북도당 등 5개 부대가 있었다. 그 외에는 운양산·자작산·회문산·모후산·화학산 등에 두 개 내지 3~4개의 부대가 존재하였다.

1954년 4월부터 5월에 이르기까지 군의 작전으로 인하여 많은 수의 빨치산 전투 부대들이 사라졌다. 1956년 7월 1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빨치산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한 일이 있었는데, 이로써 빨치산은 정부의 공식 기록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지리산에서는 1963년 11월 지리산 최후의 여자 빨치산으로 알려진 전순덕이 내원골에서 총상을 입고 생포됨으로써 지리산 빨치산의 최후를 고했다.

[민족사의 최대 비극]

사실 지리산에서의 동족상잔은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다. 단순히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살육과 약탈 만행을 저지른 것은 빨치산이든 국군·경찰이든 모두 피해자였다. 그렇지만 작전 중에 누대로 지리산 자락에 삶의 터전을 잡았던 무고한 주민들이 입은 인적·물적 피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른바 “낮에는 대한민국이요,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다”라는 웃지 못할 비극은 그들이 당시에 얼마나 위험하고 절박한 환경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지를 반증해 주고 있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들은 본질적으로 병력·식량·무기 등을 자체 조달하여 투쟁하는 무장 단체였으므로 밤이면 민가로 내려와 식량을 약탈하거나 지서·관공서 등을 습격하여 무기와 필요한 부품들을 조달했다.

그들은 군경뿐만 아니라 지주와 우익 인사들, 심지어는 양민마저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에 거주하고 있는 빨치산 출신 이모 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라북도 도당위원장이었던 방준표가 이끈 빨치산 부대는 마을 이장을 총검으로 살인하고 난 뒤 소주를 마시며 간을 꺼내 씹어 먹었다고 한다.

현재 그 진위는 확인할 수 없으나 당시 남원군 일대에서 빨치산들이 벌인 학살과 보급 투쟁은 산간 주민들의 삶에 엄청난 고통을 주었음을 지금도 노인들의 구전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에 의해서도 양민을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그들은 빨치산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빨치산으로 오인된 양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는데, 1951년 2월경 대량 양민 학살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1951년 2월 11일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3대대(대대장 한동석)에 의해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등 5개 마을의 부녀자, 노약자, 어린이를 포함한 순수 민간인 719명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명목으로 집단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바로 3일전에는(즉 2월 8일경, 음력설 이튿날) 위 부대에 의해서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주민 500여 명이 학살당하는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다. 속칭 ‘산청 함양 양민학살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정확한 사망자 수도 파악되지 않았다.

남원 지역에서는 『운성지』의 기록에 의하면, 지리산 남원 지구 운봉 4개 읍·면의 인적 피해는 사상자 및 행방불명된 주민을 포함하여 총 270여 명에 달했다. 불타거나 파괴된 건물이 360호, 교량 파괴가 5개소, 가축 등 기타 피해가 1,106점이었다. 지역별 손실 상황을 살펴보면, 살해된 공무원 수는 운봉이 총 57명 중 37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체 사망자는 산내면이 123명으로 총 피해자의 절반에 가까웠다. 물적 피해 역시 지리산에 인접한 산내면이 가장 컸다.

[평화와 용서 그리고 화해]

이제 지리산에 평화가 깃든 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들, 특히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빨갱이로 오인을 받거나 참으로 위험하고 불미스러운 일이었다. 아직도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빨치산 전력이 있었던 70~80세의 노인들은 한 평생 숨을 죽이고 숨어 살아야만 했으며, 그들에게 피해를 당한 우익 인사들의 자손들도 가슴에 적개심을 품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와 용서 그리고 화해가 민족사의 화두가 되었다. 우리는 남북 공존과 평화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반세기 전에 왜 우리가 지리산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한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빨치산의 아버지 이현상은 지식 분자였으며 반외세, 반제국주의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는 남한 사회에 공산주의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왜 월북하지 않고 끝까지 지리산에 남아 투쟁했는지 생각해 보면, 그에게 지리산은 단순히 산이 아니라 혁명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이현상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게 이용만 당하고 지리산에서 최후를 마쳤다. 그의 유격대가 대한민국에 입힌 타격은 결코 미화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현상은 일본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로서 그리고 이념과 실천에 충실한 지식인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자리매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 이현상을 평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백선엽 장군이다. 지리산을 두고 두 사람은 너무나 판이한 길을 걸어왔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백선엽이 해방 전에 벌였던 반민족 행위는 결코 감추어질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군대를 창설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고 한국전쟁 중 혁혁한 전과를 세운 공로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지리산에서 보여 준 인생 행로는 민족사의 모순이자 비극이었다. 따라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반세기 전에 지리산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용서와 화합으로 승화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그 자체로만 있다면 박물관에 진열해 놓은 박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1951년 7월 이현상은 남원시 산내면 논골에서 제2차 6개도당회의를 열었다.
지명연구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논골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문의하니까 누운골(와운)은 있는데 논골은 없다고 하더군요.
전화나 메일로 답변 부탁드립니다.
20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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