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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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이칭/별칭 | 동학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성묵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4년 9월 - 2차 동학농민운동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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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시기/일시 | 1894년 1월 10일 - 동학농민운동 농민군 고부관아 습격 |
발생|시작 장소 | 동학농민운동 - 충청남도 예산군 |
관련 인물/단체 | 동학농민운동군 |
[정의]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힘을 합쳐 보국안민, 척양척왜 등의 기치 아래 일어난 농민운동.
[개설]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접주인 전봉준(全琫準)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수천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고부관아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를 빌미로 당시 고종을 비롯과 집권 세력의 오판 아래 청나라가 1894년 5월에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군대를 보내었고, 일본도 1894년 5월과 6월 군대를 보내 서울로 진격하였다. 1894년 6월 18일 일본군 경복궁 점령으로 고종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무력 침략 행위에 위기위식을 느낀 동학농민군은 9월 18일 해월 최시형이 내린 총기포령에 따라 남접과 북접 세력이 논산에서 연합하여 후천개벽을 향한 염원을 담아 반외세 반침략주의 의병 투쟁을 벌였다. 예산을 비롯한 내포 지역은 1894년 9월 그믐 자시에 덕의대접주 박인호(朴寅浩)의 기포령이 내려지자 내포 각처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적 배경]
1824년 10월 28일 현재의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출생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했다. 당시 무너지고 있던 조선의 전통 질서와 동양을 침범하던 서양의 근대적 질서를 동시에 비판하며, 새로운 신념 체계로서 동학을 창도하였다. 동학은 창도와 아울러 안으로는 조선의 봉건적인 질서와 충돌하게 되고, 밖으로는 서구의 침략과도 충돌하는 고통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국제정세는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앞세운 서구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무너뜨리며 사회의 혼란을 부추겼다. 그리고 조선의 지배 세력은 총체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해결할 능력과 의지도 가지지 못하고 기득권을 누리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층민들을 중심으로 불만을 더 가중시켰고 봉건적 착취와 외세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한 민중 저항 의식으로 발전되었다. 결국 삼남지방 70여 개 고을에서 농민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동학은 민중에게 평등사상을 심어 주면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번졌다. 마침내 1894년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민중의 요구를 반영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었다.
[경과]
공주취회, 광화문복합상소, 보은취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박인호는 내포 지역의 동학 조직을 지휘하다가 최시형의 총기포령이 내려지자 내포 지역 기포 명령을 내렸다.
예산 지역은 고덕 구만리, 용리, 덕산 북문리, 대흥 갈신, 금곡, 광시 서초정리 등 동학 조직이 활발했던 마을에서 집단 기포가 이루어졌다. 내포 각지에서 포조직이 일시에 일어나자 수만의 동학농민군은 해당 관아를 습격하고 체포된 동학접주를 구출하고 지방관아 벼슬아치를 잡아 처형하기도 했다.
덕의대접주 박인호는 곧바로 삽교 하포리 자택에 설치되었던 도소를 옮겨 이웃 성리 장촌면 소에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지휘본부로 삼았다. 지휘본부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기 위해 각처에서 군량미와 죽창, 농기구, 탈취한 관아 무기 등으로 무장을 했으나 농민군 출신으로 조직돼 규율이 서지 않아 지휘체계가 무질서하였다. 이런 틈을 노려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 홍주 목사 이승우는 보부상으로부터 동학농민군의 동태 등 정보를 입수한 후 중군 김병돈에게 토벌 명령을 내렸다. 김병돈은 각 진에서 뽑은 용장 500명을 거느리고 예포대도소를 기습 공격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수적 우세에도 전투 준비에 소홀한 결과 3시간 접전 끝에 패퇴하였다. 많은 군량미와 소금 등을 빼앗기고 예포대도소는 불태워졌다.
이후 계속되는 유림과 관의 색출과 무차별한 탄압이 계속되자 흩어졌던 동학농민군은 10월 21일경 운산면 여미리에 재집결하여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창의문을 선포하고 보국안민, 척양척왜, 제폭구민, 광제창생의 기치를 새롭게 들었다. 한양을 공격한다는 계획으로 2만여 동학농민군은 24일 면천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목에서 아카마즈가 이끄는 일본군 정예부대를 패퇴시켰다. 면천읍성을 무혈입성한 동학농민군은 고덕을 지나 구만리 하포리를 거치면서 세력이 더욱 커졌다. 오가 역탑리에 주둔한 다음 신례원 관작리로 이동했다. 관작리에서 내포 지역과 충북 진천 등의 농민군까지 합세하여 충남 최대 집결지를 이루었다. 10월 26일 오전 한양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홍주에서 관군과 유회군이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포위 작전을 펼쳐 관군대장 김덕경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패주하는 토벌군을 추격하여 대승을 하였다. 동학농민군 지휘부는 한양 진격 계획을 접고 후방에서 공격하는 토벌군의 진원지 홍주성을 우선 점령하자는 주장이 앞서 다음날 예산관아를 점령 후 삽교 역리, 송산리로 진군하고 유숙하였다. 28일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신제를 올린 다음 3만여 동학농민군은 지금의 내포신도시를 지나 홍주성으로 향하였다. 28일 저녁 홍주성 북서쪽 빙고치전투를 시작으로 홍주성전투가 시작되었지만 높고 견고한 석성 위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농민군은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200여 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동문 공격을 했지만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수한 사상자만 발생하였다.
[결과]
동학농민군은 사기와 수적 우위만으로 홍주성전투를 펼쳤으나 견고한 성벽과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감당치 못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고 다음 날 각 포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서산 태안 농민군은 해미읍성에 주둔하고 예산 아산 지역의 농민군은 오가 역탑리에 주둔하였다. 내포 지역 진압군인 선봉진 이두황 부대가 12월 5일 예산으로 향해 오자 오가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해미읍성으로 후퇴하였다.
곧바로 이두황 부대는 가야산을 넘어 해미읍성 북문 쪽으로 공격해 오자 준비 태세를 갖추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혼비백산 흩어져 해안가로 야산으로 후퇴하였으나 관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대부분 생포되어 현장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일부는 홍주성으로 압송되어 무참히 처형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동학농민운동은 한국 근대사의 전환점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또한 역사와 전통을 아우르는 면에서 지역 상징의 큰 요소를 이루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닌, 조선 후기에 빈발했던 많은 민란의 연장선 위에서 동학이라는 새 사상을 업고 발발한 사건이다.
예산은 1883년 동학에 입도한 박인호의 출신지이다. 내포동학 총지휘자 박인호는 해월 최시형의 수제자가 되어 내포 지역에 동학을 전파하고 조직을 갖추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동학 조직은 수운 최제우의 신원운동과 탄압 중지를 정부에 요구하는 집단활동을 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박인호는 2차봉기의 시발점인 해월 최시형의 총기령에 따라 반봉건 반침략주의의 기치 아래 막골기포령을 내려 내포 지역 봉기를 주도했다.
내포 지역 기포 명령지 예산은 구한말 삼정문란이 지속될 때 내포 지역 종래 군·현·마을 단위에 국한되어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민란을 내포 지역 차원의 항쟁으로 이끌었다. 일시적 투쟁에 머물렀던 농민봉기를 전면적 투쟁으로 발전시킨 시발점이 예산의 동학이었고, 박인호와 박덕칠이 그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말 예산 지역의 향촌사회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토호, 향반, 향리의 지배층과 평민과 천민의 피지배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 예산의 넓은 농토가 펼쳐지고, 내포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와 물산이 풍하고 시장이 번성하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사대부의 향장이 많고 토호, 향반의 토지 소유 집중이 어느 지역보다 심해 지배층과 농민 간의 갈등과 모순이 깊었다. 그러한 조건 아래 동학이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고, 들판 지역에 살았던 박인호는 이 지역에서 많은 지지기반을 얻을 수 있었다.
1894년 2차 봉기에 해당하는 예산 지역 동학농민운동은 박인호의 지휘 아래 주요 전투에서 승전하였으나 홍주성에서 패퇴하여 농민군의 전력이 급속히 떨어졌다. 이후 진압군의 계속된 추격과 공격으로 수많은 농민군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타지역보다 일찍 진압당하는 과정을 겪었다.
내포 지역 동학농민군이 작성한 호소문을 분석하면 동학농민군의 성격을 다음 네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차별없는 인간 평등 운동이었다. 둘째, 전국적인 농민운동이었다. 셋째, 조선 왕조의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개혁운동이었다. 넷째, 외세를 몰아내는 반침략 자주운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민중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의지로 발전적으로 계승되었으며 후세에 사회정의와 보국안민의 정신적 실천 운동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