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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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端宗信仰 |
영어공식명칭 | Danjong-sinang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학주 |
[정의]
강원도 영월군에서 조선 전기 임금 단종의 신령을 모시는 민속신앙.
[개설]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1441~1457]은 강원도 영월 지역에 유배되어 죽임을 당한 후, 영월을 중심으로 인근의 강원도 태백·정선 지역에서 신령으로 받들어진다. 이렇듯 우리 민속에서는 왕과 장군 등을 지낸 비운의 인물이 죽어 영웅이 되거나 신이 되어 받들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단종은 숙부인 세조(世祖)에 의하여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고 죽임을 당하였다. 어린 나이에 한(恨)을 품은 채 불합리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에 민중은 억울하게 죽은 단종을 산신, 서낭신, 무속신 등으로 모시고 마을이나 개인의 복을 비는 대상으로 삼았고, 강원도의 영월, 태백, 정선, 평창과 경상도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단종을 신령으로 모시는 단종신앙이 확산되었다.
[단종신앙의 생성 배경]
단종은 세종(世宗)의 손자이면서 문종(文宗)의 아들로서 8세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0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2세에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15세에 세조에 의하여 양위를 하였으며 16세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영월로 유배되어 서인(庶人)이 된 후 17세에 죽음을 맞이한다. 단종이 죽고 나서 60여 년이 지난 1516년(중종 11)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고, 1698년(숙종 24)에는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한은 간단히 풀어질 리 없었다. 이에 민중은 한 맺힌 단종의 넋이 태백산신이 되어 갔다거나, 여량리 서낭신이 되었다거나 무속신이 되어 모셔진다거나 하는 믿음을 품게 되었으며 이에 단종을 여러 종류의 민속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더욱이 단종이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단종 자신의 죽음과 장례에도 원인이 있었다.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가져왔을 때 단종이 어찌 왔느냐고 물었다. 왕방연이 대답을 얼른 하지 못하자, 평소에 노산군을 모시던 공생(貢生)이 자청하여 한 가닥 활줄로 단종의 목을 조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단종의 시신은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장사 지냈다. 죽음부터 장례까지 어느 것에도 왕에 대한 예우는 없었다. 이에 단종은 한 맺힌 인물로 민중에게 인식되었다.
이처럼 단종의 삶과 죽음은 민중에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우리 민속에서 왕과 장군 등의 인물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였을 경우 민속신앙의 대상이 되는 사례가 많이 나타난다. 남이(南怡) 장군, 이괄(李适) 장군, 경순왕(敬順王), 최영(崔瑩) 장군 등이 그런 인물이다. 단종의 경우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였기에 민속신앙의 숭배 대상으로 생성된 것이다.
[단종신앙의 민속신앙적 연원]
한 맺힌 죽음이 민속신앙의 대상이 될 때는 그에 합당한 연원을 부여한다. 살아서 신묘한 행적을 보였다든가, 죽은 후에 현몽이나 치병 등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초월적인 힘을 지닌 인물을 신령으로 모실 때 무사안녕과 풍요를 보장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단종은 임금이었기 때문에 군왕신(君王神)으로서 신력(神力)을 갖추고 있다. 이에 단종신앙권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단종 신령을 더욱 민속신앙적 대상으로 초월화·영웅화하여 갔다. 곧, 단종신앙은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서 비롯되지만, 그런 한 맺힌 억울함에 또 다른 능력을 부여하면서 더욱 영험한 모습으로 부각된다. 신이 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1472년 백성이 단종을 부처와 동일시하여 “노산군이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요언(妖言)이 이미 나돌았다.”라고 하였다. 탄생부터 범상치 않았음을 말하는 내용인데, 사람들이 단종을 신격화하고자 단종의 탄생에 갖가지 능력을 부여한 것이다. 남효온(南孝溫)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매양 밝은 새벽에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를 입고 걸상에 손수 앉아 있으면 보는 자가 일어나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내가 가물 때 향을 피워 빌면 비가 쏟아졌다.”라고 하였다. 이는 단종이 비를 내리는 능력을 가진 신령이라고 보고 있음을 말한 내용이다.
단종신앙은 단종의 죽음으로 더욱 확고하여졌다. 이긍익(李肯翼)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영남야언(嶺南野言)』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단종이 죽은 날 벌써 태백산신령이 되어 떠나는 모습을 봤다고 쓰여 있다. 그 내용은 “해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관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노산이 백마를 타고 동곡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을 만났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뵈오며, ‘관가에서 어디를 가시는 길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노산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태백산으로 놀러간다.’라고 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관에 들어가니, 벌써 해를 당하였다.”라는 것이다. 이 내용에 따르면 단종은 죽어서 태백산의 신령이 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산신이 되어 간다고 믿는 의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단종신앙의 네 가지 형태]
단종신앙은 영월을 중심으로 정선, 태백, 봉화 등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멀리는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계룡산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단종을 신령으로 모신 민속신앙이 여러 지역으로 확산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적 확산은 제의의 확산도 가져왔다. 대체로 제의의 양상은 영월에서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단종문화제이고, 둘째는 산신제이고, 셋째는 서낭제이고, 넷째는 무속적 제의이다.
첫째, 단종문화제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1698년(숙종 24)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원된 이후 매년 제향을 올려오다가 1967년부터 문화 행사와 함께 제1회 단종제를 개최하였다. 2007년 이후 명칭을 단종문화제로 바꾸어 2021년 현재 54회에 이르고 있다. 영월군에서 청명 한식을 전후하여 개최하는데 영월·평창·정선의 군수들이 헌관으로 배향한다. 단종만 배향되는 것이 아니라 단종을 따랐던 충신들의 넋도 위무하고,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를 기리는 정순왕후선발대회도 열고 있다. 단종에 대한 제사가 핵심이지만 대왕신령굿, 영산대제, 단종 국장 재현, 예술 공연, 민속 행사 등 다양한 행사를 함께 행하고 있다. 한편, 단종문화제와 관련하여 공주 계룡산의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서 숙모전 대제가 음력으로 3월과 시월에 행하여진다.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가 단종의 어의를 가지고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동학사로 가서 초혼제를 지낸 데에서 유래한 제사이다.
둘째, 산신제이다. 단종이 산신이 된 내력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나오지만, 추익한(秋益漢)과 관련한 전설에도 나온다. 추익한이 산머루를 따서 단종에게 올리려고 관풍헌으로 오는 도중, 곤룡포를 입고 백마를 탄 단종을 만났다. 거기서 산머루를 올리면서 “어디로 행차하시느냐?”고 물으니 단종은 “태백산으로 간다.”라고 하였다. 추익한이 이를 이상히 여겨 급히 영월에 와 보니 단종이 변을 당한 후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백산에 사당을 세우고, 어려움이 있을 때 찾아가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산신이 된 단종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데, 단종이 산신으로서 태백산으로 향하던 길목에 있는 새길령, 와석리, 녹전리 등의 마을에서도 단종을 신령으로 모시고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셋째, 서낭제이다. 단종의 신령은 서낭신으로도 모셔지고 있다. 영월읍의 영모전 서낭제, >내리 서낭제, 청령포 서낭제, 대왕각 서낭제, 여량리 서낭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영모전[강원도 유형문화재]은 단종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민속신앙의 장소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영모전에 단종의 영혼을 모시고 경모하면서 단종의 보호를 받고 살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설날 같은 명절, 단종이 죽은 날, 또는 소원이 있을 때에도 앞다퉈 경배하고 분향을 드린다.
넷째, 무속적 제의이다. 단종의 원혼은 무녀들의 몸주[무당의 몸에 처음으로 내린 신]로 강림하는 경우도 있다. 무녀 강귀옥이나 김춘자 등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강귀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국사당에서 단종의 영정을 모시고 1990년부터 굿을 올렸다. 강귀옥은 태백산으로 가던 중 영월에서 단종신이 내려 대왕굿을 하게 되었고, 단종신이 경복궁을 보고 싶다고 하여서 경복궁 옆 필운동으로 이사하여 단종신을 신당에 모셨다고 한다. 강귀옥은 단종문화제에서도 한풀이굿을 진행하는 주무(主巫)[무당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는다. 영월읍 덕포리에 거주한 김춘자는 강귀옥보다 앞서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단종제에서 태백산신령굿을 벌였다.
한편, 단종신앙은 영월의 민속놀이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영월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칡줄다리기, 섶다리놓기, 띠놀이 등이 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