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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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江書院 |
영어공식명칭 | Namgang Seowon |
이칭/별칭 | 남강서당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서원3길 8-31[우곡리 16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우곡리에 있던 조선 후기 서원.
[개설]
남강서원(南江書院)은 1571년(선조 4) 남강서당(南江書堂)으로 처음 건립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서원으로 승격하면서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황(李滉)[1501~1570]을 제향하였다. 이언적의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회재(晦齋),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설 논쟁이라 할 수 있는 태극논쟁(太極論爭)을 펼쳤다.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유배당했다. 이황의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영남학파의 종주로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이언적·이황은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위치]
철폐되기 전 남강서원이 자리했던 ‘남강(南江)’은 지금의 영덕읍내 동편에 해당한다. 동쪽으로 고불봉이 있으며, 남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오십천이 흐른다. 남쪽에 하천이 흐르기 때문에 ‘남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변천]
1571년 영덕현령(盈德縣令) 정자(鄭磁)가 영덕 유림 김난서(金鸞瑞)·신귀년(申龜年)·신홍제(申弘濟)·신경제(申經濟)·박인걸(朴仁傑)과 더불어 남강서당을 처음 건립하였다. 1621년 이언적·이황을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또한 서원을 엄곡(嚴谷)[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구미리]으로 옮겼다가 1642년(인조 20) 원래 위치로 환원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이때 위패는 서원 옆 대나무밭 죽대(竹臺)에 매안(埋安)하였다.
[형태]
건립 당시 남강서원은 사당인 3칸의 체인묘(體仁廟), 강당인 8칸의 전교당(典敎堂), 누각인 6칸의 망도루(望道樓), 각 3칸인 정문·직방재(直方齋)·광풍실(光風室)·장서각(藏書閣), 그리고 포사(庖舍) 14칸으로 구성되었다.
[현황]
철폐 이후 복설되지 않았다. 서원 터에는 현재 민가가 조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남강서원은 옛 영덕현(盈德縣) 지역에서 가장 처음 설립된 서원이다. 남강서당의 건립과 남강서원 승격 과정을 통해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 영덕 지역 유림의 동향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