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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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鬱陵島徙民策 |
영어의미역 | Ulleungdo Migration Polic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고려 때 울릉도에 대한 개척 정책의 일환으로 본토 주민의 이주를 시도한 정책.
[개설]
우산국(于山國)은 930년(태조 13)에 고려에 토산물을 바쳤으나 고려 현종조 이전까지는 우산국으로 불리면서 독자적 정치 세력을 가진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후 현종 때 동북여진(東北女眞)의 침공으로 그 자립 기반이 무너짐으로써 고려 왕조의 개척 정책이 시도되고, 본토의 주민을 이주시켜 군현을 설치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변천]
울릉도를 개척하여 본토의 주민을 이주시켜 주현(州縣)을 설치하려는 시도는 의종 때에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울진현의 울릉도조에 의하면, 1161년(의종 11)에 왕이 울릉도는 면적이 넓고 땅이 비옥하며 옛날에는 주현을 설치한 일도 있으므로 능히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인 김유립(金柔立)을 파견하여 시찰하게 하였다.
김유립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섬에는 큰 산이 있으며, 이 산마루로부터 바다까지의 거리는 동쪽으로는 1만여 보(步), 서쪽으로는 1만 3천여 보, 남쪽으로는 1만 5천여 보, 북쪽으로는 8천여 보입니다. 마을이 있던 옛 터가 7개소 있고, 돌부처·철로 만든 종·돌탑 등이 있으며, 시호(柴胡)·고본(藁本)·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위와 돌들이 많아서 사람이 살 곳이 못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울릉도를 개척하여 백성들을 이주하려는 여론은 중지되었다.
또 『고려사』 열전 반역 최충헌 부 최우 조에 의하면, 무신정권 때 최우(崔瑀)가 사람을 보내서 시찰해본 결과, 집터와 주춧돌이 완연히 있으므로 동부 지방의 군 주민들을 이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풍랑과 파도가 험악해서 익사자가 많다는 이유로 이민을 중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