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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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鞠賢男旌閭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건립 시기/일시 | 1695년 - 정려기 기록에 의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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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88년 - 바로 옆 위치로 이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2년 - 정문과 담장 보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8년 - 단청 보수 |
현 소재지 | 국현남 정려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
성격 | 정려 |
양식 | 홑처마|맞배지붕|민도리 양식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국현남(鞠賢男)의 정려.
[개설]
국현남[1589~?]의 본관은 담양(潭陽)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국현남은 아버지가 연로하여 점점 귀가 어두워져 잘 듣지 못하자 매일의 생활을 종이와 나무껍질, 그리고 목편에 글로 쓰고 그려 보여 드리고, 또 그것을 상자 속에 모아 놓았다. 1646년(인조 24) 서산 지역 사람 조시응(趙時應)의 무고로 억울하게 투옥되었는데, 감옥에서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3일간이나 통곡하니 감옥의 한 귀퉁이가 무너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들은 인조가 국현남의 집에 있는 문서를 가져다 살피도록 하였는데, 귀가 어두운 아버지가 보던 문서와 목편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내용 중에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자 국현남이 자신의 옷으로 싸서 묻었다는 사연이 있었는데, 이에 관해 물으니 늙은 아버지가 아끼며 기르던 개를 차마 먹을 수 없어 후원에 묻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이 효성에 감복하여 상자에 “구충신어효자지문 유여차지행 안유여피지사(求忠臣於孝子之門有如此之行安有如彼之事)”라고 직접 적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렸다고 한다.
[위치]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서당골에 자리한다. 서산시 부석면 지산2리 지파동에서 도요동골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넘어 동편 산길로 120m 정도 가면 소도비산 구릉의 하단부 남향 사면에 국현남 정려(鞠賢男旌閭)가 있다.
[변천]
인조 때 명정을 받았다고 전해지나, 정려기에 기록된 건립 연대는 1695년(숙종 21)이다. 「효자경재국공정려중수기(孝子敬齋鞠公旌閭重修記)」는 1972년 김세기(金世基)가 짓고, 후손 국종(鞠琮)이 쓴 것으로 군수의 지원과 성암서원(聖巖書院)의 협조로 정문과 담장을 보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담양국공현남정문천건기(潭陽鞠公賢男旌門遷建記)」는 1988년 단청과 이건한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박종화(朴宗和)가 찬하고, 국종이 썼다. 현재 건물은 원래 바로 옆에 있던 것을 1988년에 이건한 것이다.
[형태]
방형(方形)의 시멘트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방주형 초석 위에 4각의 기둥을 올리고 있으며, 사면에 홍살이 둘러져 있는 홑처마 맞배지붕의 민도리 양식이다. 국현남 정려 측면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현황]
2011년 현재 국현남 정려 내부에는 명정 현판과 정려기 3개가 걸려 있다. 명정문은 ‘효자통정대부국현남지문강희삼십사년을해립(孝子通政大夫鞠賢男之門康熙三十四年乙亥立)’이라 기록되어 있어 1695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통정대부경재국공정려기(通政大夫敬齋鞠公旌閭記)」는 1917년에 최종화(崔鍾和)가 찬한 것으로, 정려가 내려지고 중수된 사연과 국현남의 행적을 자세히 적고 있다. 1646년 효행을 칭찬하면서 통정대부를 하사한 것과 1695년에 순무어사 송광연(宋光演)의 청으로 정려가 건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 「효자경재국공정려중수기」와 「담양국공현남정문천건기」가 걸려 있다.
[의의와 평가]
국현남 정려의 건립은 선조의 추숭 활동을 통해 담양 국씨(潭陽鞠氏)가 서산 일대 향촌 사회에서 가지는 역량을 뒷받침 해주는 유적이기도 하다. 현재로서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효행과 관하여 임금이 직접 행적을 묻고 벼슬을 내렸다는 사연은 특기할 만하다. 또한 정려의 건립 과정을 통해 서산 지역 담양 국씨의 사족 활동의 일면을 파악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