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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044
한자 儒敎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해준

[정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행해지는 공자(孔子)의 사상과 관련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개설]

유교(儒敎)는 공자 및 맹자(孟子), 주자(朱子) 등 유가(儒家)의 정치사상과 학문 수양, 그리고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현세적 사상이자 종교이다. 유교에도 중심 경전이 있지만 일정한 계통을 갖춘 사원이나 교회를 만드는 것과 같은 교조화된 신앙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즉 후세에 공자와 그 제자들을 비롯한 성현을 제향하고 기념하는 성소(聖所)로서 대성전(大成殿)과 같은 사우(祠宇)를 태학(太學)과 향교에 설치하거나, 선현을 추모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한 터전으로서 서원을 세우는 등의 방법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폈다.

[삼국 시대~통일 신라 시대]

우리나라에 유교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 시대이다. 서산이 속해있던 백제는 행정관서 등을 제정함에 있어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3세기 고이왕 대에 중앙 관제를 육좌평(六佐平) 16관계(十六官階)로 제정하였는데, 이는 『주례(周禮)』의 6관제(六官制)에 상응하는 것이다.

또 백제의 사서 편찬과 학문적 사상에서도 유교와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4세기 경 백제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국사(國史)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했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박사의 칭호로 보아 당시 이미 대학 제도와 전문 학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강례박사(講禮博士)를 청해오게 하여 당시 이미 유교의 경전 사상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산 지역에서도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시원적이나마 유교 교육이 실행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통일 신라의 9주 중 서산 지역은 웅천주 부성군이었는데 당시 이곳에 최치원(崔致遠)[857~?]이 태수로 부임해왔다. 최치원은 당시 당나라까지 문명을 떨친 대유학자였으며, 부성군이 당나라에 가는 중요 교통로로서 이를 관리하기 위한 인물로 발탁된 것이다. 따라서 통일 신라 시대 서산 지역은 이와 같은 인물의 영향으로 인한 유학의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 시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의하면 당시 정치 이념의 근간을 유교에서 구하고 있고, 이러한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되었다. 광종은 과거 제도를 시작하였고, 성종최승로(崔承老)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기반으로 한 정치 체계를 구축하였다.

12세기 인종 대에는 학교 교육을 더욱 공고히 하여 국자감에는 육학(六學)을 두고, 지방의 주·군·현에는 향학(鄕學)을 두었다. 서산 지역도 이러한 향학이 설치되어 국가 정책에 따른 유교 교육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우리나라의 초창기 주자학을 체계화시킨 이곡(李穀)·이색(李穡) 부자가 서산과 가까운 서천 한산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이 또한 주자 성리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서산에서는 고려 후기 성리학자이자 문신 관리였던 정인경(鄭仁卿)[1241~1305], 유숙(柳淑)[1324~1368] 등과 같은 인물을 배출해 내기에 이른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서산의 성리학 연구와 교육 및 관련 활동 일반은 더욱 활발해졌다. 조선 왕조가 창건되자 1398년 성균관을 세우고, 문묘에는 중국의 제현과 우리나라의 제현을 제향 하였다. 그리고 지방 부·목·군·현에도 향교를 1개교씩 설치해 교수 또는 훈도(訓導)를 두고, 교생의 정원은 부·목 90, 도호부 70, 군 50, 현 30으로 되어 있었다.

서산 지역에도 역시 향교를 운영하였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서산향교는 군 서쪽 1리에 있으며 향교에 문묘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다. 사직단도 치소 서쪽에 있어 제사를 올렸다. “해미향교는 현 동쪽 3리 지점에 있으며, 역시 향교에 문묘가 갖추어져 있고, 사직단 역시 본 현 서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산 지역의 사립 유교 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원·사우는 1694년[숙종 20]에 건립된 송곡사(松谷祠)[정신보·정인경·유방택[류방택윤황·유백유·유박순·유윤·김적·김위재 제향]와 1719년(숙종 45)에 건립 된 성암서원(聖巖書院)[유숙·김홍욱 제향]이 대표적이다. 나머지 진충사(振忠祠)[정충신(鄭忠信) 제향, 1897년 부조묘 건립], 부성사(富城祠)[최치원 제향, 1907년 창건], 숭덕사(崇德祠)[회안대군 이방간 제향, 1607년 부조묘 건립]는 모두 한 사람만을 배향한 사우이다.

서산 지역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국난이 있을 때마다 많은 충신들이 활약하였다. 의병 활동을 전개한 김호열(金好說)[1534~?], 이유검(李惟儉)[1538~1592], 강효윤(姜孝胤), 유지립(柳之立)[1555~?], 문성해(文成海)[1540~?], 한효순(韓孝純)[1543~1621], 곽설(郭說)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또한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정충신과, 병자호란에 순절한 이원길(李元吉)[1580~1636], 조후윤(趙後尹), 김홍익(金弘翼)[1581~1636] 등이 유명하다.

이와 같은 유교의 영향을 받은 효자와 열녀의 배출도 많았다. 우선 『호산록(湖山錄)』 고금인물조에는 노비인 계복(戒福), 유흡(柳洽), 안천년(安千年), 이수(李秀), 이유성(李惟誠), 이이수(李㶊壽), 조존세(趙存世), 최달제(崔達悌), 한희(韓熹), 황필대(黃必大)가 기록되어 있다. 이어 『여지도서(輿地圖書)』 인물조에는 효자로 유희원(柳希瑗)과 한우승(韓遇升)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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