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30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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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在來市場-魚市場-生活文化 |
영어의미역 | Life in Fish Market and the Traditional Marketplac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남일,증보:심재홍 |
[정의]
현대적인 생활 형태로 삶이 바뀌면서 재래시장은 점차 그 거래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젊은 사람들의 기호와는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재래시장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지역민들의 삶과 함께 해왔다. 재래시장 속에서 강릉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개설]
재래시장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삶의 터전으로, 지역 사람들의 삶의 냄새가 배어나는 곳이다. 삶의 기본구조인 경제적 생산과 소비를 담당하는 공간인 재래시장은 우리들에게 물질적 만족뿐 아니라 정신적 양식도 함께 제공한다. 재래시장의 다양한 상점 형태와 상품의 모습은 우리들의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눈으로 보여주면서 삶의 행복 또한 보여주는 것이다.
강릉 지역에는 중앙시장, 동부시장, 서부시장, 포남시장, 번개시장, 농산물도매시장, 주문진어시장, 옥계장터 등의 다양한 재래시장이 있다. 이 시장들이 점차 그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뜻있는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점차 축소되어 가는 규모와 줄어드는 시민들의 발길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 면모를 이어가고 있는 강릉의 재래시장들을 함께 살펴본다.
[역사]
시장은 인류가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서로 분업의 생산 방식을 채택하면서부터 생겨난 상업 행위의 장이다.
상업은 자급자족의 시대 이후 도구의 발달로 인한 잉여의 발생으로 인해 생겨난 물물 교환 형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화폐의 등장에 따라 화폐를 매개로 한 거래가 점차 이루어졌고, 그 규모와 형태가 더더욱 발전하여 일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정한 날짜에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정한 장소적 행위로서의 상업과 소비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 시장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장은 삼국시대부터 주화가 사용되어 정기시장의 장시(場市)가 형성되었고, 후에 상설 시장으로 변모하였다. 고구려의 삼경제도(三京制度) 등에서 기초적인 상업 시설이 존재했을 거라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여러 기록에서 보면, 백제는 전국에 걸쳐 성읍시(城邑市)라는 시장이 있었고, 신라에는 정기시장보다 상설화된 동시(東市)가 설치되었으며, 신라가 통일된 후에는 경주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관리하는 시전(市廛)이라는 기관이 설치되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시전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시장에서는 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좌상(坐商), 행상(行商), 선상(船商)이 있었다.
시장의 형태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고려시대보다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각 지역에는 체계적인 상업 교역의 시장 형태로 장문(場門)이 있었다. 장문은 조선 전기에 유행했다. 이후에 향시(鄕市), 허시(墟市) 등으로 불리는 장시가 생겼다. 각 지방의 군과 읍 및 면 등에서는 주로 행상인에 의한 상업 행위가 이루어졌으며, 교환 경제 형태의 향시인 장시가 개설되었다.
강릉의 재래시장은 그 구체적 기록이 없으나, 16세기 전반에 걸쳐 전국에 장시가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아 강릉에서도 이 시기에 재래시장으로서의 장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년]에 수록된 강원도의 장시 수는 68개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미루어보아 강릉의 장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한국근대도지(韓國近代道誌)』를 통하여 여러 곳에 장시가 개설되었고, 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인구도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음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강릉 지방에는 강릉장[2. 7 개시], 연곡장[3. 8 개시], 옥계장[4. 9 개시], 주문진장[1. 6 개시], 강동장[1. 6 개시], 망상장[5. 10 개시], 구산장[1. 6 개시]이 있었다. 이들 장시는 모두 지역민들의 수요와 공급의 필요에 따라 교통의 요지에 개설되었다. 행상 중심으로 물품의 상호 교역 시장이었는데, 상설 시장이라기보다는 5일 간격으로 열리는 정기시장으로 농작물, 임산물, 수산물, 부업으로 만든 수공업품 등이 물물 교환 또는 쌀, 포목, 화폐 등을 매개로 교환되었다.
이 같은 장시에서는 인근 각지를 돌면서 행상을 전업으로 하는 보부상이 큰 역할을 하였다. 강릉 지방도 강릉장을 중심으로 주문진장과 강동장, 구산장이 먼저 개시되고, 후에는 연곡장과 옥계장이 개시되었다. 강릉장을 주축으로 3일과 8일에 북평장과 진부장, 4일과 9일은 양양장과 대화장, 5일과 10일에는 임계장과 평창장으로 장과 장 사이에 상호 연계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일정한 범위 내에 여러 개의 장시가 장날을 교체하면서 자체 시장을 이루기도 하고, 인접 지방과 연결되어 새로운 시장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강릉 지방의 장터에서는 농산물과 수산물, 임산물이 상품의 주종을 이루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농산물과 임산물로는 모시, 활 만드는 데 사용되는 뽕나무, 댓살[죽전(竹箭)], 잣, 오미자, 자단향, 황양, 자초, 송이버섯, 인삼, 지황, 복령, 벌꿀, 백화사 등이 거래되고, 수산물로는 물개, 소금, 미역, 참가사리, 김, 해삼, 전복, 홍합, 문어, 삼치, 방어, 광어, 적어, 고등어, 대구어, 황어, 연어, 송어, 도루묵, 누치, 어항어, 순채, 게조개 등이 거래되었다.
당시의 대외 무역은 중국, 일본, 여진 등과의 무역으로 국가 독점 하에 이루어졌다. 강릉 지역은 지방에서 생산되고 지방에서 소비하는 형태로, 소규모 상인들에 의한 도성민 교역 유통 과정만 형성되었다. 이런 상행위의 결과 상업을 생업으로 삼는 상인 계층이 형성되었고 나아가 향시로 발전되었다.
일제강점기 전기[1910년대-1920년대까지]의 강릉 지역에는 강릉 읍내와 주문진항 근처에 주로 점포가 형성되었다. 상품의 이동은 주로 남북을 축으로 하여 부산과 원산 양 방면으로 많이 이동하였으며, 동절기를 제외하고는 차량을 통해 대관령을 넘어 유입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초기에 강릉에서 시장은 주로 소규모로 형성되었으나 그 상권은 평창·정선·삼척·부산·원산·포항 등까지 걸쳐져 있었다. 1926년의 경우 강릉군 내에는 모두 5개의 시장이 개설되고 있었다. 그리고 1920년대 강릉의 재래시장에서 구입한 주요 물품의 종류, 금액, 구입처 등과 강릉의 특산품이 판매된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1923년 당시의 강릉에는 강릉면에서 경영하는 공설 시장이 본정(本町)·욱정(旭町)·대정정(大正町) 일부에 걸쳐 있었다. 공설 시장의 면적은 7986.78㎡였으며, 매월 2·7·12·17·22·27일에 장이 열렸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요 상품으로는 농산물·수산물·축산물·직물·신탄유(薪炭油)·소채·과일·도자기 및 기타 일반 잡화 등이었다. 시장 상인의 종류와 상인 수는 상사주식회사(商事株式會社)가 1, 은행업 1, 금융조합 1, 중매업 12, 대금업 6, 제조업 10, 여인숙 35, 음식점업 7, 자동차업 3, 자전거업 3, 주조업 2, 도매업 4, 소매업 950, 해륙물산위탁판매업(海陸物産委託販賣業) 10, 조각업(彫刻業) 4, 운송업 3, 질옥업(質屋業) 3, 창고업 5개에 달하였으며, 상인의 총수는 1,123명이었다.
주문진시장은 사설 시장으로 6347㎡ 규모였으며, 매월 1·6·11·16·21·26일에 개설되었다. 주요 상품으로는 농산물·수산물·임산물·직물·축류(畜類)·금물류(金物類)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후기[1930년대-해방 전]에 이르면 강릉 지역에 있던 재래의 보통 시장과 공설 시장의 명칭이 일제에 의해 변경되어서 1호 시장과 2호 시장으로 바뀐다. 1호 시장은 시 외곽의 정기시장으로 농산물과 수산물 등 1차 상품의 거래가 대종을 이루었다.
당시 강릉 지역 정기시장으로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시장조에 의하면 강릉시장, 연곡시장, 주문진시장, 강동시장, 옥계시장 등이 있었다. 『임영지(臨瀛誌)』의 기록에 의하면, 강릉재래시장에서 거래된 농산물로는 인삼, 해송자, 송이버섯[松蕈], 지황, 복령, 천초(川椒), 당귀, 만삼(蔓蔘), 목방기, 연근, 꿀, 산약, 자초, 황백, 오미자, 자당향, 대추, 배, 밤, 은행, 감, 능금, 모과, 포도, 연자(蓮子) 등이며, 수산물은 문어, 홍합, 대구, 송어, 청어, 광어, 해삼, 연어, 연란(鰱卵), 은어, 멸치, 잉어, 붕어, 명태, 새우, 목장어(目張魚), 낙지, 절인 생선, 해서(海鼠), 옥저어(玉筯魚), 농어, 가재미, 상어 등이다. 강릉의 2호 시장은 시내의 각종 상설 시장으로, 어채류 등이 매일 거래되었으며, 점포는 잡화점과도 같은 규모의 상점들이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국세조사보고(朝鮮國勢調査報告)』 중 직업별 인구 현황에서 당시의 시장 현황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강릉 시장의 모습은 공급-소비의 주요 품목 및 점포의 종류 현황으로도 살펴볼 수 있다. 1930년대 강릉의 주요 시장의 모습을 보면, 가장 많은 업종은 생선·조개 판매업주로 95명이고, 다음으로는 의류업주 83명, 양곡상 73명, 음식료품·기호품 판매업주 48명, 약품·염료·안료·화장품류 판매업주 41명, 채소·과일류 판매업주 31명, 양복류 판매업주 25명 순이다.
그리고 강릉 지역도 타 시군 지역과 같이 일본인에게 상권을 빼앗긴 상태로 대부분 상점이 일본인에 의해 경영되기도 하였다[당시 강릉군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했는데, 당시 일본인은 763명으로 5.2%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대정정(大正町)[현재의 강릉시 남문동 일대]과 본정통(本町通)[현재의 택시부 광장에서 한국은행까지의 거리]에서 상점을 경영했는데, 업종별로 보면, 여관업[梅田, 富田, 一力, 薩摩屋旅館 등], 철물점[波多野, 에비나, 川崎 등], 과자점[巴堂], 솥과 주물[佐武, 億星堂 등], 식료품과 잡화점[長谷部, 前芝, 田中, 野田, 嶺原, 吉田 등], 음식점[山崎오덴, 淸酒場], 서점[井出龜商店], 총포사[山本], 간장[丸江獎油], 얼음[다루마집], 전당포[今城], 목재점[坂井, 今村], 종묘[玉井], 운수회사[丸江自動車], 철공소[岩木], 자전거[富士] 및 양복점[山本吳服] 등 다양하게 개점하였다[1930년대 강릉시가지 약도 참조: 강릉문화원, 『땀으로 가꾼 강릉50년사』]. 강릉 사람의 상점도 여러 업종별로 개점하고 있었는데, 수적으로 가장 많은 상점은 포목점이었다[강릉문화원에서 1992년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강릉·명주의 근대풍물』에 1930년대 강릉시의 약도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강릉에서 시장을 둘러싼 다양한 사건과 사고들도 많이 일어났다.
1936년 8월 26일~28일에는 일명 병자년 포락(浦落)으로[강수량 358.5㎜, 8월 한 달 강수량은 654.8㎜][강릉기상대 자료에 의하면 8월 26일에 52.9㎜, 27일에 134.1㎜, 28일에 171.3㎜로 기록되어 있다.] 제방 둑[현 강릉의료원 앞 삼거리 부근]이 터져 강릉 일대가 물에 잠기게 되어 상점을 비롯한 시장 여러 곳이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어느 정도 복구가 되면서 상점도 점차 증가하여 현재 강릉시 성남동 금방거리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상권이 형성되었다.
1941년 4월 12일경 화신연쇄점[속칭 누비집, 현재 강릉철물점 부근]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때마침 강풍이 불어 강릉시 성남동 일대 상점을 비롯한 모든 가구(家具)가 완전 소실되어 큰 피해를 보았다. 화재에 의한 피해가 있은 후 1943년 11월 20일 강릉시 성남동 205-20번지에 함석과 기와로 이은 목조 2층 구조 1996.69㎡에 48개의 점포를 갖추어 제1시장 즉 공설 시장 가운데 상설 시장이 문을 열었다.[제1시장은 시장법에 의한 명칭이 아니라 강릉에서 제일 먼저 개설하였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5일마다 개설되는 정기시장은 제1공설시장 부근과 현재 택시부 주차장 광장 인근에 생선과 곡물 등이 거래되어 형성되었다. 가축시장[우시장]도 정기시장이 서는 날에 현 남대천 철교 부근에서 이루어졌다.
주문진읍 지역 상권도 강릉시 중심지와 비슷한 추세로 일본인이 341명[3.8%] 거주하였다. 주문진읍 상권의 주요 업종으로는 잡화점[江上, 도마리, 宮崎, 아라키, 立田 등], 음식점[大福, 白賓, 福万 등], 여관[三河屋], 화물취급소[木村], 조선소, 목욕탕, 사진관, 통조림 공장, 정어리기름 공장, 생과자점 및 선구점(船具店) 등이 있었는데 거의 일본인에 의해 개점된 상가였다.
한편 이 당시 정기시장은 주문진보다는 강릉시 연곡면 동덕리에서 더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36년 병자년 포락으로 시장터가 유실되어 주문장이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리에 개설되었고, 현재는 그곳을 구시장이라고 부른다. 주문진은 시장으로서의 기능보다는, 부산과 원산 간을 운항하는 화물선의 하역지로서 강릉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개항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했던 곳이다. 한류와 난류가 합류하던 곳으로 어장이 형성되어 어업 전진 기지로 발전한 곳이기도 하다.
광복이 되고 1950년대에도 강릉의 시장은, 일제강점기의 구분 용어인 제1호 시장, 제2호 시장, 제3호 시장 명칭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제1시장은 강릉에서 제일 먼저 개설된 시장으로 광복 이전에도 상권이 형성되어 활발하게 거래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6·25 전쟁 후에는 강릉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소위 ‘미제 제품’이 이 시장에서 다양하게 거래되었다. 제1시장은 1962년 9월 20일 자유시장으로 개칭되어 오다가 제2시장 즉 중앙시장이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면서 주변 시장으로서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제2시장은 1956년 10월 21일 중앙시장으로 개칭되었으며, 제3시장은 서부시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중앙시장과 서부시장은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1960년대 들어서 강릉 지역의 공설 시장으로는 상설 시장과 정기시장이 있었다. 1960년대 말까지 상설 시장 2개소가 개설되었고, 명주군에도 상설 시장 1개소와 정기시장 1개소가 개장되었다. 1979년을 기준으로 강릉의 재래시장은 공설 시장에서 사설 시장으로 개설되었다. 한편 명주군의 경우는 공설 시장이 존속되면서 상설 시장과 정기시장이 늘게 되었다. 법령의 공포로 시장이 개설되면서 지방 향시인 5일장은 정기시장 부분만 강릉시와 주문진읍, 옥계읍에서 부분적으로 계속되어올 뿐 나머지 지역 장시는 인근 상설 시장에 흡수되어 개설되지 않고 있다.
1980년대 강릉시, 명주군의 상설 시장으로는 현재까지 존속되는 성남동의 중앙시장, 용강동의 서부시장, 옥천동의 동부시장, 주문진시장 등과 지금은 폐업 상태에 있는 포남시장 등이 있었다.
[현황]
지금까지 강릉 지역 시장의 역사를 알아보았고, 이제 현재 강릉에 개설되어 있는 재래시장의 현황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강릉의 재래시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앙시장이다.
중앙시장의 개설은 1980년 1월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재개발한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 실제로는 강릉의 생성과 때를 같이할 만큼 오래된 시장이다. 현재의 시장 건물은 1956년에 설립한 공설 시장 건물들을 철거한 후 1979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현대식 건물로 개축 및 2004년 리모델링 및 이후 전통 시장 활성화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고수부지 전용 주차장 확보, 전용 주차 타워 구비, 시장 건물 리모델링, 간판 정비, 지붕 씌우기 등 많은 공간적인 변화를 가졌다.
중앙시장은 재래시장과 지하의 수산 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적으로 중앙시장은 지하 수산 시장, 지상 건어물, 포목, 양품, 귀금속, 미곡, 식료품 등 314개 점포를 관리 영역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시장 권역은 현재 선프라자빌딩 앞에서부터 중앙시장까지의 금학동, 성남동 일대를 중앙시장이라 부른다. 또한 이 시장은 강릉시의 생성과 더불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어 강릉 대생활권의 중심을 이루면서 점차 팽창해서, 실제로는 본래의 시장보다 몇 배나 많은 상점군을 그 주위에 거느리고 있다.
시장 영역의 광역적 측면에서 보아도 중앙시장의 시장 권역은 강릉을 중심으로 주문진, 진부, 횡계, 홍천 남면까지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법적으로 ‘중앙시장’이라는 명칭으로 개설되기 이전에도 이 중앙시장 주변은 실질적 재래시장으로서 곶감전, 나무 시장, 미곡 시장 등이 즐비하던 곳이다. 특히 이곳에 있던 대추, 밤, 건어물 등의 제수용품과 폐백용품들을 파는 상점은 아직까지 밀집하고 있다. 중앙시장 같은 재래시장의 또 다른 특징은 빼곡하게 늘어선 노점이다. 현대적인 시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런 노점들은 재래시장의 북적거리면서 소박한 맛을 살려주고 있다.
현재 중앙시장은 환경 개선 사업을 통하여 새로운 상가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실제로 2004년 7월~12월 국비와 지방비 보조를 통하여 지상 건물의 리모델링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소비자들의 편의를 위한 각종 시설을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대형 할인 마트와 낙후된 환경으로 인하여 감소되고 있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중앙시장과 대형 할인점 홈플러스와의 거리는 도보로 300여m]
강릉 전통 시장 활성화 사업은 고객 편의 시설 및 노후 시설 개선의 시설 현대화와, 이벤트 행사 및 마케팅 지원 등 경영 현대화 두 부문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14년부터 2015년 사이에 이루어진 중앙시장의 전통 시장 활성화 사업은 모두 12억 원이 투입되었으며, 천정 공사, 1층 복도 타일 파손 보완 공사, 지하층급 배기 덕트(duct) 시설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인접한 성남시장은 아케이드 녹 제거 및 도색, 낙설 방지 시설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이런 개선 사업으로 인해 중앙시장의 지하 어판장은 신선도와 청결 면에서 전국적으로 이름난 시장이 되었다. 이곳은 이른 아침에 공수해 온 다양한 수산물이 하루 종일 도심에서 거래되는 곳이다. 동해안을 끼고 있어서 신선한 어물들이 신속히 공급되고, 환경 개선 사업으로 청결한 어시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강릉시 옥천로 48[옥천동 223번지]에 있는 동부시장은 1977년 6월 19일 문을 연 이래 오늘까지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 1976년 2월 17일 동부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그해 5월 17일 강릉시에서 부지를 임차 받아 1977년 6월 4일 상가 건물을 준공하고 동년 6월 19일 개장하였다. 시장 건물의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로서, 대지 7,109㎡에 연면적 1만 120㎡, 매장 면적 6,770㎡이고, 전체 175개[2015년] 점포의 규모이다. 2003년에 16억여 원을 투입하여 리모델링을 실시하였다.
2015년 현재 동부시장 전체 175개 점포 중에는 식당류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 외에 의류점포, 잡화, 농수산물 등의 점포가 입점해 있다. 층별로는 1층에 잡화상과 슈퍼마켓, 간이주점, 식당 등이 입점하여 있으며, 2층에는 생선, 채소류, 그리고 떡과 식용유를 만들어 판매하는 편의품 위주의 상점 등이 있다. 3층과 4층에는 99세대의 주거용 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며, 아파트 입주 세대 중 약 30% 정도가 이 동부시장에 종사하고 있다.[강릉동부시장 번영회장]
다른 재래시장과 마찬가지로 동부시장도 경기가 예전 같지 않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자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입주자 대부분이 노령화되고 있어 시장 활성화를 위한 대책 마련이 쉽지 않다고 한다.
강릉시 임영로155번길 6[용강동 29]에 있는 서부시장은 1982년 노후된 구 시장 건물을 철거하고 재개발하여 아파트와 시장이 공존하는 복합 건물로 개축하였다. 재래시장의 침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서부시장은 전체 상가 면적 3,507㎡ 중 2015년 현재 162점포가 등록되어 있다. 주요 업종은 의류, 야채 등이 대부분이며, 방앗간 등과 일부 단체의 사무실이 입점해 있다. 전통 시장 활성화 사업을 통해 상호 간판 및 일부 현대화 리모델링과 CC TV 등을 설치하여 안전도 도모하였다. 입주자들의 노령화 문제는 서부시장도 당면한 과제다. 서부시장 활성화를 위한 지속적인 대책과 노력이 요망된다.
강릉의 번개시장은 새벽마다 열렸다 파하는 새벽시장을 말한다. 농산물 및 어류를 중심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번개시장을 형성하는 상인들은 주로 기존 도시 내 상가의 상인, 시장 주변에서 노점과 좌판을 하던 상인, 현지 생산자로서의 농민 및 농민과 연계한 기타 상인들이다.
강릉의 번개시장은 현재 중앙시장 인근의 철다리 아래와, 월드컵교 아래의 두 곳에서 형성되고 있다. 기존 중앙시장 옆에서 형성되는 번개시장은 주로 생산자와 도매상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으며, 새벽 5시 정도에 개장하여 월드컵교 아래 번개시장이 열리는 시간 무렵인 약 6시 30분경까지 열린다. 대략 100곳 정도의 점포가 형성되고 있다.
월드컵교 아래 번개시장은 중앙시장 옆 새벽시장이 끝나갈 무렵인 6시 30분 정도부터 열리고, 중앙시장 옆 번개시장에서 물건을 받아 온 상인과 인근 상인들이 몰려들어 형성되기 시작한다. 오전 10시 30분 이후까지도 인근 지역 주민을 비롯한 손님의 발길에 따라 이어진다. 월드컵교 아래 번개시장의 규모는 대략 50~100점포에 이르고 있으며, 하절기에는 더 크게 형성된다.
강릉의 번개시장은 지역민들에게 새벽에 신선하고 싼 상품을 공급해 준다는 이점이 있지만, 접근성과 영세성, 시설의 낙후성 등으로 경쟁력이 다소 떨어지는 형편이다.
한편 번개시장과는 대조되는 대규모 농산물 시장도 있다. 강릉시 유산로 60[유산동 160-1]에 위치한 강릉농산물도매시장은 사업비 214억 원이 투입되어 총 부지 면적 6만 5825㎡에 판매 시설 면적 2,000㎡, 경매용 시설 9,800㎡ 규모를 갖추고 지난 1999년 9월 16일에 법정 도매 시장으로 개장하여 지속적인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옥계의 재래 민속장은 정기시장으로, 매 끝자리 수 4일과 9일에 열린다. 옥계장은 옥계 읍내인 버스 정류장 주변에서 열리며, 농어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농수산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시장은 모두 주변 주민들의 노점과 좌판 형태로 형성된다. 가장 많은 상품은 농산물인 야채, 곡물 등으로 전체 상품의 70% 정도를 차지하며, 이 외에 생선, 건어물, 과일, 잡화류 등의 상품을 갖추고 있다.
주문진 지역은 구시장과 신시장으로 상권을 나누어 볼 수 있다. 사설 시장을 중심으로 광복 이전부터 형성되어 온 채소 시장의 구시장과 어시장을 핵으로 이루어진 신시장이 상호 보완 관계를 유지하면서 장덕리와 주문리 등을 중심으로 상권을 이루고 있다. 주문진 재래시장 사람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바다를 통해 이루어진다.
주문진의 전통적인 재래시장으로는 주문진 중앙시장, 주문진 수산시장, 수협종합판매센터, 바닷가에 위치한 난전 형태의 시장이 있다. 이들의 특징은 전국 최대의 어항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환경이니만큼 주로 수산물 거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주문진의 재래시장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은 1986년에 사설 시장으로 설립된 주문진 수산시장이다. 시장의 외형적 규모를 보면, 총 대지 면적 2,126㎡에 건물 면적 2,802㎡, 매장 면적 1,881㎡ 규모의 2층 건물이다. 수산물 판매점 등 점포 수는 개별 점포 40개소에 달한다.
주문진 수산시장 앞 도로변 양측에 즐비하게 입점한 상가들은 주문진 수산시장 번영회 소속은 아니지만 수산시장의 규모를 함께 형성해 주고 있다.
주문진 중앙시장은 주문진 종합시장과 주문진 건어물시장 등으로 구분되어 불리는데, 주문진 종합시장은 주로 수산물, 그리고 지역 농산물 및 생활용품, 잡화 등을 지역민과 양양 인근의 주민들에게 공급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주문진의 수산시장에서 특이한 것이 난전 형태의 바닷가에 밀집한 좌판들은 새로이 정비되어 항구 가까이 상가 형태를 갖추어 현대화하여 수산시장의 열기를 형성해 주고 있다. 싱싱한 해산물을 직접 먹을 수 있는 장소까지 제공하고 있어 주문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주문진항은 속초항, 묵호항과 함께 강원도 3대 어항의 하나로 어업 전진 기지다. 이러한 주문진 어시장은 ‘강릉’이라는 바닷가를 끼고 살아가는 강릉의 독특한 지방 문화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주문진 어시장과 재래시장은 수산물이 주종을 이루며, 주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지역민들에 필요한 생활 잡화 등이 주요 구성을 이룬다. 특히 주로 오징어잡이가 성행하여 오징어 관련 해산물 점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주문진에 분포하는 재래시장의 주요 특성중 하나는 점포들의 상호가 대부분 각 지방의 지명을 따왔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시장 사람들 가운데 외지인이 많이 있음을 짐작케 해준다. 주문진 부두 건설 이후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늘면서 많은 타지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재래시장은 현대화된 대형 할인 마트 등에 밀려, 이제는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이나 동네 주민들만 주로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재래시장은 우리 자신이 살아온 삶의 모습과 향기가 그대로 담겨 있는 곳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 일상에 푸근한 인심과 전통이 이어지도록 해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힘들어도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시장이다. 재래시장을 외면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 속의 그런 전통적이고 소박한 부분을 외면하려는 심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