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8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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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寺刹 |
영어음역 | sachal |
영어의미역 | temple |
이칭/별칭 | 절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홍영호 |
[정의]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곳.
[현황]
1. 문헌 수록 사찰
강릉시 소재 사찰로서 문헌에 수록된 사찰로는 굴산사(掘山寺), 보현사(普賢寺), 문수사(文殊寺), 신복사(神福寺), 등명사(燈明寺)[현 등명낙가사], 안국사(安國寺)[안곡사], 산계암(山溪菴), 염양사(艶陽寺), 청학사(靑鶴寺), 용연사(龍淵寺), 칠성암(七星菴)[현 법왕사(法王寺)], 정토암(淨土菴) 등이 있다.
굴산사(堀山寺)는 강릉의 읍지인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 보이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부도탑과 당간지주를 소개하면서 굴산사로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847년(신라 문성왕 9)에 도굴산문의 범일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 9산의 한 종파이다. 그리고 굴산사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지 않으므로 이전 시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굴산사터는 지방기념물 제11호이며, 당간지주[보물 제85호]와 부도[보물 제86호], 석불좌상[문화재자료 제38호] 등이 있다.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이 1983년에 절터를 발굴조사하면서 어골문에 ‘오대산(五臺山)’·‘굴산사(掘山寺)’가 찍힌 명문 기와를 수습하였는데, 고려시대 당시 강릉 지역이 오대산의 영역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
보현사(普賢寺)는 940년(고려 태조 23)에 세운 낭원대사 오진탑비로 보아 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사찰명은 보현산 지장선원으로 되어 있다. 후대의 기록인 『범우고(梵宇攷)』에는 보현산 지장사(地藏寺)로 나오고, 지금 폐지되었으며, 보현사가 뒤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동국여지지(東國輿址誌)』에 지장사(地藏寺) 또는 지장암(地藏庵)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보현사의 역사는 낭원대사 오진탑비의 내용에서 명주 지방 호족과 선종의 사회상 및 고려 태조 당시의 정치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최근에 보현사 「미타계좌목」이 발견되어 조선시대 보현사의 향도조직과 향촌사회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구한말에는 민용호(閔龍鎬) 의병장이 보현산성[대공산성]에서 진을 치고 활동하였다.
이밖에 신라시대에 보현사와 관련하여 인도에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강릉의 동남쪽 남항진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文殊寺)[지금의 한송사지]를 세웠는데, 이 때 보현보살은 “한 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내가 활로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을 절터로 삼아 떠나겠다.”라고 말하며 시위를 당기니 보현사 터에 화살이 떨어졌으므로 이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하여 온다. 이 설화는 『동문선(東文選)』제71권에 실린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서 사람들이 문수와 보현이 땅 속에서 솟아나온 것이라 한 기록과 관련 된다.
소장 문화재로는 940년에 세워진 낭원대사 오진탑[보물 제191호], 낭원대사 오진탑비[보물 제192호]와 보현사 대웅전[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7호, 조선 후기]이 있다. 이 외에 대웅보전 안에는 흙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아미타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1822년(도광 2)에 묵기의 후불탱과 1799년(가경 4년 기미) 묵기의 탱화가 있다. 그리고 영산전에는 1851년(함풍 원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화가 있다. 그 외 경파당대선사진영, 화곡당대선사진영1·2가 있다. 또한 조선 후기·말기의 석종형 부도가 21기가 있으며, "乾隆五十九年甲寅 八月日江陵普賢寺 大鐘記(건륭오십구년갑인 팔월일강릉보현사 대종기)"라고 기록된 동종(1794년)이 강릉 시내 관음사[포교당]에 있다.
③ 문수사(文殊寺), 강릉시 남항진리
문수사(文殊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범우고(梵宇攷)』, 『관동지(關東誌)』, 『관동읍지(關東邑誌)』, 『대동지지(大東地志)』,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강원도지(江原道誌)』 등에 소개되어 있다. 특히 『범우고(梵宇攷)』, 『관동지(關東誌)』, 『관동읍지(關東邑誌)』,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강원도지(江原道誌)』에는 한송사(寒松寺)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문수사[한송사]의 역사를 밝힐 만한 사료가 없지만, 한송사지에서 발견된 석조보살상 2구(국보 제124호, 보물 제81호)의 양식과 절터에 있는 탑재, 장대석, 추정 기단면석 등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 초기-전기에는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문헌과 지리지에서도 보이므로 단속적으로라도 사찰이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두 보살상은 월정사(月精寺) 및 신복사지(神福寺址)의 보살좌상과 양식학적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 지역 유파의 양식을 반영한다. 현재 절터에는 근년에 건립된 대웅전, 북두칠성당 및 비석 1기와 주변과 입구에는 기와편이 산재해 있다.
신복사(神福寺)는 강릉의 읍지인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사찰조에 심복사(尋福寺)가 있으나 폐하여졌고, 석증조에는 범일이 신복사와 굴산사(堀山寺)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신라 범일국사가 850년경 굴산사를 창건하고 그의 말사로 신복사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또한 심복사 또는 신복사라고 기록되어 있어 사찰의 명칭이 혼란하고, 심지어는 신복사(神伏寺)로 불리워 왔다고도 전해진다. 사찰명에 대해서는 1936년과 1937년에 ‘신복(神福)’이라 쓴 기와편이 발견되어 신복사지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신복사(神福寺)’라고 쓰여진 기와가 수습·소개된 바 있다. 최근의 시굴조사에서도 ‘신복사(神福寺)’라고 찍힌 명문 기와가 많이 수습되어, 이 절터가 신복사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 조사를 통하여 창건 시기는 10세기 중후반 경, 즉 석탑·보살상의 조성시기와 일치하며, 폐사 시기는 조선시대 중반 이후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터에는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4호]과 3층석탑[보물 제87호]이 있다. 3층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징을 잘 보여 주며, 석조보살좌상은 월정사(月精寺) 보살상과 흡사하여 같은 유파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한송사지에서 출토된 보살상과 함께 강릉 지방에서 유행했던 한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⑤ 등명사(燈明寺)[현 등명낙가사], 강동면 정동진리 산 7-3
등명사(燈明寺)는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의 화비령(火飛嶺) 동록(東麓) 괘방산 중턱에 자리하며, 동해를 굽어보고 있다. 창건 연대와 역사를 정확히 알려주는 기록은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릉대도호부 불우조에 ‘府 동쪽 30리에 있다.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 등명사에 와서 해돋이를 보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존재하였던 사찰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여지도서(輿地圖書)』, 『범우고(梵宇攷)』, 『대동지지(大東地志)』,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강원도지(江原道誌)』에도 그 존재가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폐하여졌다고 기록되었으므로 조선후기에는 법등이 단속적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사찰의 경내에는 5층석탑(강원도유형문화재 제37호)이 있고, 바로 뒤쪽의 평탄면에는 원형 주초석들이 있어 옛 건물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른 폐탑재도 있는데, 양식학적으로 5층석탑보다 시대가 앞서고,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신라 말-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절터가 처음 창건된 시기가 신라 말-고려 초일 가능성이 있다.
이후 등명사의 옛 터에 고경덕(高景德) 스님이 1956년에 작은 절을 짓고, 1천일 관음기도 끝에 해수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침술을 점지 받아 의술을 베풀었다. 절을 증축하면서 관세음보살이 계신 보타락가산이라 하여 ‘낙가사(洛伽寺)’로 사찰명을 정하고, 옛 사찰명인 '등명'을 앞에 붙여 등명낙가사(燈明洛伽寺)라 하였다. 그리고 고경덕 스님은 1977년에 영산전을 건립하고 청자로 만든 오백나한상을 봉안하였다. 그 뒤 1982년에 주지로 부임한 청우 스님은 범종각, 삼성각, 요사채, 극락전, 약사전을 건립하였다.
⑥ 안국사(安國寺)[안곡사],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 774
안국사(安國寺)는 강릉의 읍지인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 ‘安谷寺在城山面安谷洞年代未詳堂宇燒失但石塔高五尺三寸幅三尺全面刻佛像石碑高二尺地藏尊石造殘留今廢’라는 기록과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성산면 관음리사지(觀音里寺址), 강릉 서쪽 약 2리 구산리의 북 약 10정(町) 관음리 전중(田中)에 있음. 초석, 석원(石垣), 파손된 5층석탑 및 석좌불상이 있음. 일반적으로 그것은 안국사지(安國寺址)라 칭함.’이라는 기록이 있다. 위의 사료와 함께 이 절터가 위치한 자연 지명이 안곡(安谷)이므로 안곡사(安谷寺) 혹은 안국사로 볼 수 있다. 실제, 관동대학교 박물관이 ‘안국사(安國寺)’라고 적힌 명문기와편 1점을 수습하였다고 1994년에 보고한 바 있는데, 기와의 문양은 어골문에 글자를 넣은 것으로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절터에는 고려시대 양식을 잘 보여주는 5층 석탑[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2호]과 석불의 대좌로 보이는 석물, 장대석, 축대 등이 남아 있다.
⑦ 산계암(山溪菴),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1232
산계암(山溪菴)은 강릉의 읍지인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 ‘山溪菴在府南八十里山溪嶺下’란 기록만 있을 뿐이다. 현재, 절터에는 도괴된 석탑재를 모아 놓은 고려시대 양식의 3층석탑[문화재자료 제43호] 1기가 있고, 그 일대에 각종 기와 조각과 도기 조각, 자기 조각이 산재해 있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의 발간 시기와 3층석탑의 조성 시기가 다르므로 고려시대의 사찰명이 산계암일 가능성은 적다.
⑧ 염양사(艶陽寺), 강릉 읍성 북쪽
염양사(艶陽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화부산에 있고, 이곡(李穀)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고만 기록되었고, 동일한 기사가 『여지도서(輿地圖書)』, 『범우고(梵宇攷)』에도 실려 있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는 염양사가 강릉 읍성 북쪽에 있고, 원나라 1324년(태정 갑자년)에 읍인 사예(司藝) 박징(朴澄)이 그 근처에다 장사를 지내고, 옛 절터에 불당을 지어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고,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기문을 지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상원사 창고를 돌보는 곳으로 삼았으나 민폐가 심하여 후에 철폐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강원도지(江原道誌)』사찰조에도 동일한 기사가 실려 있다. 실제 『성종실록(成宗實錄)』[10年 5月 辛酉條]에는 상원사(上院寺), 낙산사(洛山寺)와 더불어 염양사(艶陽寺)가 농장을 광범위하게 운영하는 것을 지적하는 기사가 보인다.
사찰의 창건 시기는 이곡(李穀)[1298~1351]의 「고려국강릉부염양선사중흥기(高麗國江陵府艶陽禪師重興記)」에 의하면, 당시 퇴락된 절을 중흥하였으므로 그 초창은 훨씬 이전일 것이다. 그리고 문헌상으로는 『범우고(梵宇攷)』에 폐사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조선 후기에는 황폐해졌다고 볼 수 있다.
⑨ 청학사(靑鶴寺), 연곡면 외동길 111[삼산2리 259]
청학사(靑鶴寺)는 『범우고(梵宇攷)』에 처음 보이고, 『관동지(關東誌)』, 『관동읍지(關東邑誌)』,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동호승람(東湖勝覽)』, 『강원도지(江原道誌)』 등에 소개되어 있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는 ‘靑鶴菴在府北七十里靑鶴山下十五間’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동호승람(東湖勝覽)』 권4 시문조에는 「청학사중수기(靑鶴寺重修記)」가 실려 있는데, 순치(順治) 연간(1644-1661)에 처묵당(處黙堂)이 수련하던 곳이라 한다.
사찰터는 현재 모두 밭으로 개간되었고, 축대석과 수많은 기와편이 쌓여 있다. 이 구사지(舊寺址)로 올라가기 전의 우측 밭[연곡면 삼산리 291-2번지]에는 석종형부도 5기가 있다. 밭 소유주인 김남극 씨는 1935년도에 이 절이 화재를 당하여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구사지(舊寺址)에서 좌측으로 난 산길을 따라 약 4㎞ 들어가면 속칭 턱개 암자골이라는 지역에 부도 2기가 있다고 한다.
⑩ 용연사(龍淵寺), 사천면 중앙서로 961[사기막리 용연동 821]
용연사(龍淵寺)는 『범우고(梵宇攷)』에 처음 보이고, 이후 『대동지지(大東地志)』, 『관동지(關東誌)』, 『관동읍지(關東邑誌)』,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강원도지(江原道誌)』 등에 소개되어 있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 ‘龍淵寺在府北三十里二十間 … 有僧玉岑經始此寺云’이라고 하여 1644년 무렵에 승려 옥잠(玉岑)이 절을 처음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고, 『동호승람(東湖勝覽)』 권4 시문조, 「용연사기(龍淵寺記)」에는 보다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일설에는 왕감대사(王嵅大師)가 응봉산(鷹峯山) 동쪽 용연동(龍淵洞) 만월산(萬月山)에 건립하였다고도 한다. 한편 용연사의 서남쪽 가까이에 석종형부도 8기가 있다.
이 절은 6·25 동란 때 전소되었다가 한 여승의 진력으로 중건되었고, 현 사찰의 경내에는 1963년에 지은 원통보전(圓通寶殿)을 위시하여 대웅전, 범종각,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1967년에 건립한 5층석탑과 석구(石龜)가 있다.
⑪ 칠성암(七星菴)[현 法王寺],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926
칠성암(七星菴)은 칠성산[금륜산] 중턱에 위치하며, 강릉의 읍지인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서부터 보인다. 고종 때 지방 선비 정은(鄭殷)이 1896년에 독서재(讀書齋)로 지은 초암(草菴)으로, 지방 부녀자의 칠성기도장(七星祈禱場)으로 이용되어 왔다. 1947년 당시의 주지 청우화상(聽雨和尙)[양경운(梁景雲)]이 윤운곡선사(尹雲谷禪師)가 중건한 10여 칸의 가람을 확장하여 대웅전과 부속건물을 새로 짓고 법왕사(法王寺)라 개칭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 5층석탑, 청우당대선사사리탑비(聽雨堂大禪師舍利塔碑), 칠성암기적비(七星菴紀蹟碑) 등이 있다. 절의 입구 좌측에는 석종형부도군이 위치해 있다. 칠성암기적비는 정주교(鄭冑敎)가 1930년에 세웠는데, 칠성암의 창건과 관련하여 704년(성덕왕 3)에 자장율사(慈藏律師)의 건립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는 신라 선덕왕자(善德王子)인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창립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굴산사의 개조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삭발하고 수도 득의한 수선도량(修禪道場)이라고도 한다.
⑫ 정토암(淨土菴), 옥계면 낙풍리 절골
정토암(淨土菴)은 강릉의 읍지인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서 옥계면에 폐사된 정토암이 있다고 기록되었고,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낙풍리 뒤쪽 사곡의 전중(田中)에 있고, 정토사지(淨土寺址)라고 칭한다고 기록되었다. 최근의 조사인 『문화유적분포지도(文化遺蹟分布地圖)-강릉시-』에는 낙풍리 절골 사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지리적 위치로 보아 정토암 가능성이 있다.
이밖에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강릉대도호부에서 도기소를 서술하면서 우계현(羽溪縣)[현재 옥계면]에 마류사(瑪瑠寺)를 언급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적조에 동루(東樓)가 용지사(龍池寺)에 있다라고 하여 용지사(龍池寺)라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 두 사찰 모두 더 이상의 문헌 사료에는 나오지 않고 있어 자세한 사적은 알 수 없다.
2. 기타 현존 사찰
문헌 기록에 사찰명이 나타나지 않으나, 현재 사찰이 존재하며, 유적·유물이 있어 역사성을 지닐 수 있는 사찰들을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방 주민이 길가에 방치된 철불[방현사지 출토]을 모시기 위하여 불각 1채를 지어 극락보전이라 명명하면서 시작되었다. 1925년 경기도 양주 석림사에서 수도하던 이춘담 화상이 극락보전의 철불을 보고 다음 해에 초암을 건립하였고, 1954년에는 초암을 중수하고 청송사라 하였다. 이 철불은 청송사에 모셔져 있다가, 1991년경에 도난을 당하였다. 경내에는 근래에 조성된 대웅전, 산신각, 요사채, 3층석탑 등이 있고, 방현사지(坊縣寺址)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연화대좌 1석이 대웅전 앞 마당에 있다.
② 송라사(松蘿寺), 연곡면 송라길 63-20[방내리 356-1]
방현사지(坊縣寺址)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는 방현사터에 송라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었다. 송라사 역시 창건 시기와 역사를 알 수 없지만,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에 이이(李珥)가 송라(松蘿)를 순행한 기사가 있는데, 송라를 송라사(松蘿寺)로 본다면 조선 중기에 존재하였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사찰은 1937년 나월화상(蘿月和尙) 이사홍(李思弘)이 창건하였다.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나월화상이 방현사지 내의 3층탑을 보고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던 중 하루는 꿈에 백발노장 스님이 현몽하여 ‘3층탑 부근 밭 가운데에 부처님이 묻혀 있으니 네가 가서 모셔라.’라는 지시를 받고 꿈속에서 말한 장소를 찾아가 팠더니 고대 석불이 나타났다. 석불을 얻은 뒤 현 위치에 송라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석불[석조약사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양식이며, 최근에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근간에 지은 대웅전, 산신각, 범종각, 법당, 요사채 등이 있다.
유등리(柳等里)에서 북쪽으로 약 3㎞ 떨어진 만월산(萬月山) 백운동(白雲洞)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유등리사지(柳等里寺址)를 소개하면서 백운사지(白雲寺址)로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의 자료들도 백운사지로 칭하고 있다. 이 사찰의 창건과 폐사 시기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동호승람(東湖勝覽)』 권3 고사조에 1545년(인종 원년)을 전후하여 남전현(藍田縣)의 백운사(白雲寺)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성제(誠齊) 최옥(崔沃) 등 명유의 강례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를 존중한다면 조선 중엽에 존재했던 사찰로 볼 수 있다.
1945년 오대산 상원사에 있던 청월(淸月)이 현몽에 의해 이곳에 초암을 지었고, 1952년에 향봉선사(香峯禪師)와 청월화상(淸月和尙)이 본사를 신축하여 1953년에 건립하였다. 1955년에는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있던 관세음보살을 옮겨 왔다. 주요 유물로는 건립 공사 시에 땅 속에서 발견한 석조[현재 백운사 석조로 이용]가 있고, 옛날 절터(현재 유등리사지) 주변에는 옛 사찰에 사용되던 장대석, 방형주초석, 팔각복연석, 팔각옥개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경내에는 근간에 건립한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다. 또한 사찰 입구 좌측에 최근에 세운 부도탑 2기가 있는데 "향봉당향눌대선사(香峯堂香訥大禪師)", "창건주청월당(創建主淸月堂)"이라고 각각 적혀 있다.
강릉 시내 중앙시장에 위치한 관음사는 1922년에 창건되었다. 강원도의 3대 본산이었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와 고성 건봉사(乾鳳寺),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서 공동으로 출자하여 강릉불교포교소로 설립한 절이다. 창건하는 해에 금천유치원도 함께 설립하였다. 1923년에는 월정사에 있던 관세음보살좌상을 옮겨왔고, 1924년 5월 18일 강릉포교당 관음전의 신축공사를 완료하고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해방 후의 남북 분단으로 월정사 직할의 강릉포교당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 뒤 이름을 관음사로 변경하였다. 주요 유물로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소형 범종이 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조선전기의 유물로 추정되며, 소형범종은 ‘乾隆五十九年甲寅 八月日江陵普賢寺 大鐘記’라는 명문이 있어 1794년(정조 18)에 주조된 강릉 보현사의 종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