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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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庾信 |
영어음역 | Kim Yusin |
이칭/별칭 | 흥무대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김창겸 |
[정의]
신라시대의 장군이자 대신.
[개설]
김유신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큰 공을 세웠는데, 이러한 업적으로 인하여 그와 관련된 신이(神異)한 이야기들이 설화와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다. 또한 사후에 신격화(神格化)되어 민간과 무속에서도 산신 또는 서낭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김유신은 강릉 단오제(端午祭)와 관련하여 숭배되고 있다. 대관령산신당(大關嶺山神堂)에서는 김유신을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4 「대령산신찬조(大嶺山神贊條)」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계묘년(1603) 여름 내가 명주(溟州)에 있었는데, 그 당시 명주 사람들은 5월 길일을 택하여 대관령 산신을 맞이하였다. 나는 수리(首吏)에게 물었다. 이에 수리가 대답하기를 “이 신은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입니다.” 라고 하였다. 김유신이 어려서 명주에 유학하였는데 검술을 산신이 가르쳤고, 그가 소지한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만들었는데, 90일 만에 그 칼이 완성되어 빛은 달빛을 능가하였다고 한다. 김유신은 이 칼을 차고 고구려를 멸하고, 백제를 평정하였으며, 죽은 뒤 대관령 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신이 지금까지 영험하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신봉하여 해마다 5월 길일에 번개(幡蓋)와 향화(香花)를 갖추어 대관령으로 가서 그 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한다. 신이 즐거우면 길상이 깃들어 풍년이 든다고 하고, 신이 노하면 반드시 풍수의 천재지변을 준다고 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그 광경을 보았는데, 명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하며 서로 경하하고 춤을 추었다.” 는 기록이 그것이다.
현재도 강릉에서는 산길의 안전과 풍농(豊農)·풍어(豊漁)를 비는 강릉단오제가 거행되고 있는데, 이때 주신(主神)인 서낭신은 범일국사신(梵日國師神)이고, 산신은 김유신장군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허균의 기록을 따른다면 김유신이 주신이 된다.
또한 강릉시 교동에는 김유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화부산사(花浮山祠)가 있다. 1884년(고종 21) 후손인 김홍두(金弘斗) 등이 화부산사 옛터에 중건하고 제중사(濟衆祠)에서 위패를 옮겨다 봉안하였다. 경내에는 1910년에 건립된 '순충장렬흥무왕화부산재기적비(純忠壯烈興武王花浮山齋紀蹟碑)'가 있는데, 비문은 한말의 문신으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을 지낸 심상훈(沈相薰)이 썼다. 1977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가계]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김무력(金武力),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다. 어머니는 신라 왕족 출신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그리고 김유신의 누이는 태종무열왕의 왕비인 문명왕후(文明王后)로서 문무왕의 어머니이다. 또 그의 아내는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이며,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등 다섯 아들과 네 딸 및 서자 군승(軍勝)이 있었다.
손자로는 김윤중(金允中)·김윤문(金允文)이 있었고, 현손으로는 김장청(金長淸)의 이름이 전한다. 아우로는 삼국통일 전쟁기에 장군으로 활약한 김흠순(金欽純)이 있다. 김윤중의 서손(庶孫) 김암(金巖)은 둔갑술과 병법에 능하였다 한다.
[생애]
김유신은 만노군(萬弩郡)[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김서현을 따라간 만명부인이 595년 낳은 듯하다. 15세에는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郞徒)를 이끌었다.
629년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김춘추가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적대관계에 있었던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는데, 이에 앞서 교섭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김춘추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이때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신라에서 중요한 군사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의 활약은 뚜렷해진다.
644년에는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 해 9월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 요충인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647년에 상대등 비담(毗曇)이 일으킨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이후 김유신은 대규모 전투들에서 최고지휘관을 맡아 군대를 지휘하였다.
654년에는 신라 군대의 통수부라는 중심적 위치에서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대각간(大角干)이 되었으며,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660년 정월에는 상대등이 되어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 해 그는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661년(문무왕 1) 6월에는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663년에는 백제 부흥을 꾀하는 백제 유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왜(倭)의 연합 세력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 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 주어 평정하게 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 신라군의 총사령관 격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가지 특전을 포상받았다.
673년(문무왕 13) 김유신이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金山原)[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됨]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경명왕]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