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833 |
---|---|
한자 | 金蘭半月會 |
영어의미역 | Geumnan Banwol Socie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대길 |
[정의]
조선 전기 강원도 강릉시 지역에 있었던 강릉 지역 유학자 단체.
[개설]
조선 초기의 재지사족들은 중앙의 숭유억불 정책에 힘입어 성리학을 수용하여 정착시키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강릉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리학을 수용한 재지사족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을 교양으로 하여 입신출사를 지향하였으며, 나아가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추구하였다. 강릉 지역 금란반월회의 성향도 이와 같았다.
한편, 조선 초기에 강릉의 상원사(上院寺)가 고려 왕씨 일족의 명복을 빌어주는 불사(佛事)인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거행하는 사찰로 지정되면서 계속적인 왕실의 비호 속에서 사세(寺勢)를 크게 확장해 갔다. 사원세력의 확대는 향촌사회의 사상적, 경제적 측면에서 강릉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원사의 사세확장에 의한 제반사업은 금란반월회 회원들의 유학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요인이었으며, 또한 재지적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던 이들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1471년(성종 2)에 유학적 이념에 의하여 제도적으로 확립된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반포되고, 유학의 실천강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소학(小學)』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이 간행되는 등, 중앙에서부터 성리학적 사회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강릉에서도 서서히 성리학이 우세해졌고, 이에 따라 금란반월회의 활동도 더욱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설립목적]
강릉 지역의 향촌사회를 유학적 이념으로 개혁하기 위해 1466년(세조 12) 음력 9월 9일에 강릉 지방의 젊은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활동사항]
금란반월회의 결성은 당시 호불군주였던 세조의 비호를 받아 득세하고 있었던 상원사 및 불교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강릉의 주자학 정착과정에서 금란반월회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금란반월회는 1453년(단종 1)에서 1477년(성종 8) 사이에 12명의 생원과 진사시 과거합격자를 내었다. 구체적으로 1453년에 심가보(沈家甫), 1456년에 김이렴(金爾廉), 1465년(세조 11)에 최옥연(崔玉淵), 김대(金臺), 최자점(崔自霑), 최렴(崔濂), 김진석(金晋錫), 1468년에 김이(金彛), 김윤신(金潤身), 박시문(朴始文), 1477년(성종 8)에 박문화(朴文華), 최수(崔洙) 등의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금란반월회가 당시 강릉에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하는 유학의 정신을 보급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금란반월회에서는 ‘맹약오장(盟約五章)’이라는 회칙을 마련하여 유학을 향촌사회에 보편화시키는 데 힘썼다. 맹약오장은 길흉경조(吉凶慶弔)·양진강호(良辰講好)·과오면책(過惡面責)·오령속금(忤令贖金)·고행삭적(故行削籍)으로 되어 있다. 맹약오장은 이후에 금란반월회의 일원이었던 김윤신(金潤身)이 정덕연간(正德年間: 1506~1521)에 ‘향령(鄕令)’을 만들어 강릉에서 시행하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조직]
모두 1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의와 평가]
금란반월회는 1482년에 김대(金臺)가 성종에게 유향소 복립을 건의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앙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맞춰 강릉 지방에 주자학을 보급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