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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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族-世葬地-江南-明堂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전우용 |
[정의]
왕실과 종실의 세장지(世葬地)이던 조선시대의 강남구.
[개설]
1. 음택풍수의 길지 강남
조선 왕조 개창 이후 한양의 북악, 인왕, 남산, 낙산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잇는 도성을 쌓고 그 안의 지역을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였는데, 한성부의 실제 행정 관할 권역은 성 밖 10리 일대에까지 미쳤다. 이 지역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불렀다. 성저십리(城底十里)는 북한산, 아차산, 덕양산, 관악산의 외사산(外四山)으로 둘러싸인 지역 중 한강 이북 지역에 해당한다. 성저십리 경계 주변과 그 바깥쪽은 왕릉(王陵) 예비지 구실을 하였는데, 오늘날의 강남구 지역도 그에 포함된다.
조선 시대의 강남 지역은 음택풍수(陰宅風水) 상의 명당으로 꼽혀 왕실과 종실의 세장지(世葬地)로 자주 이용되었다. 풍수설에서는 산이 북쪽에 있고 강이 남쪽에 있는 ‘산남수북지(山南水北地)’를 양지(陽地)라 하는데, 강남 일대는 거꾸로 한강을 북쪽에 두고 관악산, 청계산, 남한산, 대모산 등을 남쪽에 두고 있어 양택지(陽宅地)로보다는 음택지(陰宅地)로 주목받았다. 한강을 건너는 데 불편과 위험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에 태종, 효령대군, 광평 대군, 성종 등의 능을 잇달아 현재의 강남구와 서초구 일대에 조성한 것도 이 때문이다.
왕족의 무덤은 당사자의 지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나뉘는데 능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한다. 그 이하의 왕족 무덤은 사인(私人)의 무덤과 마찬가지로 묘라 했다. 조선 왕조 개창 후 처음 조성된 능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으로, 현재의 중구 정동에 있었다. 도성 안에는 능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했던 태조의 고집으로 그의 능은 경복궁 가까운 곳에 마련되었다. 신덕왕후와 정적 관계였던 태종은 즉위 후 이 정릉을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정동과 정릉동 모두 정릉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태조의 능은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조성되었고[건원릉(乾元陵)], 정종의 능은 개성 인근에 마련되었다[후릉(厚陵)]. 한강 남쪽에 조성된 최초의 능은 태종의 능인 헌릉(獻陵)이다. 태종은 재위 15년째인 1415년, 좌의정 하륜(河崙)으로 하여금 경기도 광주에서 자기 능 자리를 미리 찾게 했다. 이 지시에 따라 하륜과 지신사(知申事) 류사눌(柳思訥)이 고른 곳이 대모산 기슭, 지금의 헌릉 자리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전위(傳位)한 뒤 현재의 광진구 자양동에 있던 낙천정(樂天亭)에 자주 거둥하여 매사냥 등을 즐겼는데, 이곳은 헌릉 정북방(正北方)에 해당한다. 세종도 태종을 만나기 위해 낙천정을 자주 찾았고, 도중에 중랑천을 건너는 불편을 덜기 위해 살곶이다리[전관교(箭串橋)]를 놓게 했다. 이 다리는 성종 대에야 완공되었다. 태종의 능을 한강 이남에 씀으로써, 세종을 비롯한 후대 왕들은 능행을 위해 강을 건너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3. 세종의 형제와 아들, 강남에 묻히다.
1420년(세종 7)에 승하한 태종의 비 원경왕후도 헌릉에 묻혔다. 세종의 능은 태종보다 훨씬 남쪽인 경기도 여주에 조성되었다. 세종 뿐 아니라 그 형제들의 묘도 모두 한강 이남에 있었으니 양녕대군(讓寧大君) 제(褆)의 묘는 현재의 동작구 상도동에,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묘는 현재의 서초구 방배동에 각각 조성되었다. 양녕대군의 묘와 사당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 효령대군의 묘와 사당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이다.
세종의 다섯 째 아들 광평대군은 세종 26년에 죽었는데, 그의 묘는 현재의 강남구 수서동 산 10-1 일대에 조성되었다. 이후 광평대군의 여러 후손들도 그의 묘역 주변에 묻혀 현재 이 묘역에는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묘 약 70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광평대군 묘역은 1981년 2월 5일 서울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으며 총 면적은 413,300㎡이다.
세종 이후 문종, 세조, 예종의 능은 모두 한강 이북 지역에 조성되었다. 문종의 현릉(顯陵)은 건원릉 가까운 곳에, 세조의 광릉(光陵)은 경기도 남양주에, 예종의 창릉(昌陵)은 경기도 고양에 각각 마련되었다. 세종 이후 한강 이남 지역에 다시 조성된 첫 왕릉은 성종과 그 계비 정현 왕후(貞顯王后) 윤씨의 능인 선릉(宣陵)이었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妃陵)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인데,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웠으나 비릉에는 세우지 않았다.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을 퇴위시키고 즉위한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도 선릉 바로 옆에 있다. 정릉은 처음 경기도 고양군 원당리에 조성되었으나, 중종의 제2 계비인 문정왕후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문정 왕후는 자기 사후에 이곳에 함께 묻힐 작정이었으나 뜻과는 달리 태릉에 묻혔다. 이에 정릉은 태조의 능인 건원릉, 후대에 복권된 단종의 장릉과 함께 왕릉만 있고 비릉이 없는 무덤이 되었다. 선릉과 정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었는데 능역은 198813.19㎡이다.
5. 인릉과 이후원 묘
중종의 정릉 이후 한강 이남 지역에는 한 동안 왕릉이 새로 조성되지 않았다. 그러다 정조가 그 부친 사도세자[추존 장조]의 융릉(隆陵)을 수원에 쓰고 그 자신도 그 옆 건릉(健陵)에 묻히면서 다시 주목받게 된 듯하다. 정조의 아들 순조의 능은 처음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의 장릉 옆에 조성되었으나 풍수가 좋지 않다 하여 1856년(철종 7) 태종의 헌릉 옆으로 이장했다. 이장 이듬해에 승하한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도 합장되었다. 헌릉과 인릉은 1970년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1,193,071㎡이다.
광평대군 묘역 인근, 대모산 동남쪽 자락에는 광평대군의 7세손인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1598-1660]의 묘역이 있다. 이후원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창했다. 효종대 우의정이 되어 송시열, 송준길 등 후일 노론의 영수가 되는 인물들을 발굴했으며, 북벌 계획에도 적극적이었다. 1668년(현종 9) 충정공(忠貞公)으로 책봉되었고 1685년(숙종 11)에는 광주 수곡서원(秀谷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는 처음 경기도 금천 삼석산에 조성되었으나, 1704년 현 위치로 옮겼다. 묘역 면적은 2,039.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