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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2567
영어음역 Chunhyanggwa Sarangui Dosi Namwon
영어의미역 Namwon, City of Chunyang and Romance
이칭/별칭 춘향골 남원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찬용

[개설]

남원은 「춘향가」「춘향전」을 배경으로 판소리와 고전 문학의 꽃을 피운 사랑의 도시이다. 남원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문화로 대표될 수 있는 춘향 문화를 간직한 고장이기에 국민적 트랜드로서의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전 국민이 애국가 다음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춘향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이라는 시대적 테마를 제공하고 있기에 충분하다. 이미 춘향과 남원은 둘이 아닌 하나로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고, 춘향 문화는 21세기 문화 콘텐츠로서 손색이 없는 소재임에 틀림없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춘향 문화]

판소리 「춘향가」와 고전 소설 「춘향전」은 내용을 굳이 알리려 하지 않아도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인식한다. 춘향 스토리는 사회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마침내 완성되는 권선징악의 상징으로, 문학적·사회학적·예술적 소재로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매년 수십여 편의 춘향 관련 작품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충분하게 각색되어 각종 TV 드라마와 영화, 연극, 희곡, 뮤지컬, 창극을 비롯하여 문학, 음악, 미술 등을 총망라하는 문화 예술 전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바로 그 중심에 남원이 있다. 남원의 춘향 문화는 더 다듬어야 할 보석의 원석처럼 21세기 문화 콘텐츠가 되어 전 세계로 번역되고 있다. 이제 춘향 문화는 남원인만의 문화적 창조물에서 벗어나 세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 문화에서 생성된 춘향 문화는 애초에는 남원인에 의해 구전되다가 판소리 12마당의 한 소재로 활용되었고, 「춘향전」이라는 기록 문학으로 정착하였다. 근현대에 이르러 남원은 국내 최고령이자 한국 최초의 축제인 춘향제를 탄생시켰으며 이후 사랑의 도시를 표방하면서 현재까지 80년 가까이 춘향 축제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거행하였다. 이제 남원인들은 춘향 문화를 남원을 넘어선 다문화적인 소재로 활용하는데도 노력해야 한다.

[세계화해야 할 춘향 문화]

남원은 판소리 「춘향가」와 고전 소설 「춘향전」의 고장답게 춘향과 관련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심에는 춘향 스토리를 세계화하려 했던 남원 사람들이 있다. 어두운 사회를 밝은 사회로 만들려 했던 남원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춘향이라는 인물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다.

춘향 이야기의 탄생은 임진왜란 후 피폐한 남원 지역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임진왜란 중의 최대 격전지였던 남원 지역 패전의 아픔을 치유해준 일대의 사건이었다. 그렇게 춘향은 아픔과 슬픔으로 신음하던 남원 사람들에게 시원한 청량제 역할을 하면서 탄생했던 것이다.

춘향 이야기에는 사회적 계층간 갈등의 표현 방식이 잘 표출되어 있다. 퇴기 월매의 딸 춘향과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 사이에는 사회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였다. 신분 높은 양반 자제인 이몽룡이 춘향을 처음 만난 광한루원광한루에서 시작되는 스토리는 남원 전체의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춘향의 집인 월매 집, 춘향과 이몽룡이 헤어진 오리정, 박석고개, 암행어사로 돌아온 이몽룡과의 해후 장소인 남원부청, 춘향의 무덤으로 알려진 남원시 주천면 지리산 구룡계곡에 위치한 춘향 묘 등은 춘향 문화를 생성하는 중요한 소재였고, 이를 통해 춘향 문화는 널리 대중화될 수 있었다. 애틋한 춘향 유적이 많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춘향 문화는 세계화의 시대적 테마와 트랜드가 되기에 충분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블루오션의 핵심 키워드인 것이다. 춘향 문화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와 비교해 봐도 더욱 깊이가 있으며 또 감동적인 스토리 전개는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춘향전」의 세계화와 국제화는 보다 심화시켜야 할 과제이다. 물론 거기에는 남원과 지리산 문화를 담아야 한다. 「춘향전」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의 약속, 그 약속에 목숨을 건 춘향 이야기가 각국에서 문화적, 예술적, 작품적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춘향 이야기는 그 주제와 서사 구조가 생산적이고 창조적이어서 감동이 넘친다. 또한 춘향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주제성과 상징성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발전적인 방향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춘향 이야기는 현실적 고충과 희망의 대립, 강자와 약자의 갈등, 몰락과 상승, 헤어짐과 만남, 슬픔과 기쁨이 교차되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춘향 이야기의 인류적 보편타당성을 획득하고 이를 널리 보급하는 것은 당면 과제이다. 춘향 이야기가 남원인의 소유가 아닌 한국인의 소유가 되고, 나아가 세계인의 소유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한국적인 소재로서 판소리 「춘향가」와 고전 소설 「춘향전」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최고의 상징 스토리, 소설 춘향전의 탄생]

「춘향전」은 한국의 판소리 12마당 중의 한 마당으로 생성되었다. 처음에는 장터와 소리마당에서 육자배기, 무속 신상의 댓거리, 작은 단위의 소리 무대에서 민요와 같은 형식으로 불렸다. 그러한 음악적 작품들이 모여 스토리화되면서 「춘향전」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고 있었다.

판소리 「춘향가」의 사설과 단편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입에서 입으로 장터에서 장터로 전문 소리꾼의 입담이 가미되면서 소리판에서의 「춘향가」는 전국적인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 내며 기록되었고, 그 기록이 여러 지식인들의 손을 거치며 마침내 고전 소설 「춘향전」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춘향전」은 보통 조선 영조~정조대에 출현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발생 연대는 알 수 없다. 「춘향전」은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사랑의 극대화, 지배 계급의 전횡에 저항하는 평민의 상징 등을 통해 조선시대의 모순을 고발하는 시사적 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춘향전」은 그 문학적 정체성으로 조선 후기 백성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였다. 남녀노소, 양반과 하층민, 남성과 여성을 초월한 국민문학이었던 것이다. 「춘향전」 이본들이 100여 편이 넘는 것을 볼 때, 문학적·민속학적·사회적 테마인 춘향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춘향전」 판본으로는 1754년 유진한의 한시본을 비롯하여 경판본, 안성채본, 완판본, 고대본, 일사본, 신재효본 등이 있다.

[영원한 사랑의 무대, 광한루]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는 광한루원광한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광한루원은 남원을 대표하는 춘향 문화와 남원 지역의 선조들의 얼이 배어 있는 곳이다. 춘향과 이몽룡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당연히 광한루원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광한루원은 국가에서 사적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광한루원 경내의 광한루라는 누각은 1170년 고려시대 전중감이라는 벼슬을 했던 장수황씨 황공유(황희의 10대조)가 무신의 난을 피해서 남원으로 내려온 뒤 후손 황감평(황희의 6대조)이 현재 광한루 자리에 지은 조그마한 서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419년(세종 원년) 황희가 자신의 본향인 남원부청 관내로 유배되자 현재의 그 자리에 원래 있었던 자신의 문중 장수황씨 일가의 서재를 헐고서 ‘광통루’ 라는 이름의 누각을 건립한 것이 광한루의 시초였다고 한다.

황수신의 「누정기」에 의하면, 남원부사 민여공이 1434년(세종 16) 광통루 주변을 정리하면서 광통루 누각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또 1437년(세종 19) 남원부사 유지례는 광한루의 단청 작업을 하였고, 1444년(세종 26)에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광통루에 올라 경치와 경관을 감상하다 감탄하면서 광통루를 ‘광한루’로 개칭하였다.

1582년(선조 25)에는 남원부사 장의국이 광한루를 중수하면서 견우직녀의 전설이 있는 오작교를 연못 위에 축조하여 은하수를 상징하였고 흐르는 강물을 끌어들여 조경수와 농업 용수로 활용하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 전라관찰사로 재직할 때, 한라산·지리산·금강산을 광한루원에 상징화시켜 동쪽의 한라산 영주섬에는 배롱나무를, 중앙의 금강산 봉래섬에는 대나무를, 서쪽의 지리산 방장섬에는 정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 왜적에 의해 광한루 전체가 전소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남원 사람들의 원형 복원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광한루를 다시 살려냈다. 1599년에 남원부사 원신이 작은 누각으로 광한루 재건을 시작하였고, 27년 뒤인 1626년에는 남원부사 신감이 국가 지원을 받아 본래의 광한루 건물인 본루에다 날개 누각인 익랑까지 만들어 본래 광한루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지었다.

1626년 이후로는 현재까지 형태가 변하지 않은 채 보존되어 38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879년 남원부사 이용준이 대들보를 개수하고 누각의 난간을 설치하였다. 1931년과 2002년에도 국가 지원을 받은 중수 공사가 있었다. 광한루는 남향을 기본 방향으로 하여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로 지어졌고, 본루 외에도 익루라고 하는 날개 누각을 건립하여 본루의 부속 기능을 하게 하였다.

현재까지도 남원 유람의 일번지로 알려진 광한루원 경내의 광한루는 지방에 있는 전체 누각(약 1,000개)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광한루라는 건축물에는 음양사상, 풍수지리, 신선사상 등이 상징성을 지니고 삽입되어 있는데, 건축 기법, 조각상 하나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광한루는 도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남원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서의 공공성이 높은 고건축물이다. 춘향과 이몽룡의 극적인 만남,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였던 양반과 서민 간의 관계를 등장시키는데 광한루가 매개체 역할을 한 것도 광한루만의 객관적인 가치가 그 무대로 설정하기에 손색없었기 때문이리라.

[춘향을 기리는 춘향사당과 춘향제사]

춘향사당은 남원이 춘향의 고장임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남원을 상징하는 배롱나무(백일홍)와 곧은 절개를 상징한다는 대숲에서 광한루를 바라보며 북문의 동쪽 끝에 조영되어 있다. 춘향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조성된 전통 건축물로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지어졌다.

1931년 노계소·이현순의 발기로 춘향사당 건립이 추진되었다. 유지 강봉기, 남원권번의 이백삼, 퇴기 최봉선(부산관 경영), 유지 정광옥 등이 의기투합하여 남원군 관내 1읍 18개 면을 돌며 춘향사당의 건립 취지를 설명하고 기금을 모았다. 또한 권번에서도 기생들을 앞세워 진주, 한양, 개성 등지의 유명한 권번을 방문하여 춘향사당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 기금을 모았다고 한다.

6월 20일(음력 5월 5일) 단오날에 춘향사당 준공식을 거행하면서 국내 최초로 여성이 제관으로 참여하는 춘향제를 지냈다. 춘향사당의 출입문은 단심문(丹心門)이다. 사당 정면에 김태석(金苔錫)이 전서체로 쓴 ‘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 현판을 걸었다.

춘향사당 안에 봉안된 춘향 영정은 진주 사람 강주수의 작품으로 안치되었고, 맞은편에는 전라북도 도지사 김서규가 지은 ‘춘향사기(春香祠記)’를 걸었다. 춘향사당을 지을 때의 도편수(都片手)는 강두희였다. 춘향 영정은 1939년 김은호가 그린 초상화를 광주 사람 현준호가 기증하여 처음 영정과 함께 봉안하여 춘향제사를 지내왔으나 6·25전쟁 중에 훼손되어 최초 초상화만으로 11년 동안(제21~제31회) 제사를 지냈다.

1961년 11월 26일에 김은호가 다시 그린 영정을 5·16군사 혁명정부의 송요찬 내각 수반이 두 번째로 기증하여 최초 초상 앞에 같이 안치하여 보관하였다. 현재 춘향 영정은 사본이 춘향사당에 전시되어 있으며, 진본은 매년 춘향제의 시가지 가두행진 때 이동하는 차량 속에서만 볼 수 있다. 현재 춘향사당에서는 매년 춘향제사가 올려지고 있으며 그 햇수가 벌써 77년을 헤아리고 있다.

[한국 최초의 축제, 춘향제의 연혁]

춘향제는 현재까지 77년째 매년 5월 5일을 전후하여 춘향문화선양회와 춘향제 제전위원회가 주도하여 춘향제향, 남원시민 길놀이퍼레이드, 특산품 전시, 전국춘향선발대회, 춘향국악대전, 씨름대회, 그네뛰기, 전국궁도대회, 놀이마당, 전시체험장, 풍물시장, 각종 시민참여형 이벤트 행사 등을 벌이는 문화 관광 축제이다.

춘향제는 영원한 테마인 사랑을 주제로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전통 민속 행사로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현재 한국 최고령의 축제이자 국내 최초의 축제로서의 특별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춘향제는 외적으로는 춘향의 숭고하고 감동적인 사랑의 세계화와 국제화를 추진하여 춘향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축제이고, 내적으로는 지역 주민의 화합과 단결을 다지는 행사이다.

춘향제는 1931년을 시작으로 2007년 현재 77년의 역사를 가지는 향토 문화 제전 행사이다. 또한 춘향제는 타 지역에 비해 특성화되어 있는 인물 중심의 문화 관광 축제다. 주제와 축제 프로그램의 특성화, 홍보와 마케팅, 축제 추진 지구, 주민 참여의 보장, 자원 봉사자의 서비스, 독창적인 아이템과 프로그램 운영 능력 등 77회의 행사를 치루는 동안 쌓인 노하우가 상당하다.

그러나 운영 주체와 운영 방식, 관련 예산의 불투명과 지역민의 참여 확대 등에서 보완해야 할 점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문제점은 춘향제가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기에 미래 지향적인 춘향제의 방향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이처럼 남원의 춘향제는 대단히 중요한 지역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문화 행사이다. 특히 춘향제향과 춘향선발대회를 위시하여 전통 문화 및 예술 체험, 창극 공연, 국악 대전, 전통 혼례를 위시한 축제 등 신·구 세대가 함께 할 수 있는 매머드급 문화 체험 축제 행사를 진행하면서 전통적인 색채를 추구해 왔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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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연도별 춘향제 행사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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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춘향제 행사 및 장소, 운영프로그램 일정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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