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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2550
한자 盧禛
영어음역 No Jin
이칭/별칭 자응,즉암,옥계,문효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손앵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함양
성별
생년 1518년연표보기
몰년 1578년연표보기
본관 풍천노씨
대표관직 전주부윤|충청도관찰사|대사헌|예조판서

[정의]

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예악에 밝았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효심이 뛰어나 노모를 봉양하느라 지병이 악화되어 1578년 향년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가계]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응(子膺), 호는 즉암(則菴)·옥계(玉溪). 증조부는 예조참판을 지낸 송재(松齋) 노숙동(盧叔仝)이며, 부친은 노우명(盧友明)이다.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생원(生員) 권시민(權時敏)의 딸이다. 노진은 슬하에 7형제를 두었다.

[활동사항]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천거로 박사가 되었다. 1555년에는 지례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아 청백리로 뽑혔다. 1560년 형조참의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는데,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지원하여 담양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다.

1567년 충청도관찰사와 전주부윤을 지낸 후, 다시 내직인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571년 다시 노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가 되었고, 이듬해 대사간·이조참의가 되고, 경상도관찰사·대사헌 등을 지냈다. 1575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한 후 신병을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등의 학자들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학문과 사상]

노진은 『대학(大學)』을 학문하는 기본으로 삼고 정진하였다. 제자들에게도 『논어(論語)』와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이는 사람의 근본 도리를 익히는 공부를 중히 여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 ‘경(敬)’을 공부의 요체로 삼았으며, 이러한 학문 자세를 바탕으로 관직 생활을 하였다.

노진은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직무를 신중히 이행하였고, 이익을 욕심내거나 치적을 뽐내지 않았다. 노진은 당시의 가장 큰 병폐가 빈부의 격차와 토지 겸병에 있다고 여겨 균전제 시행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유집으로 목판본 『옥계집(玉溪集)』 7권 4책이 전한다.

[묘소]

함양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581년 효로써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창주서원(滄洲書院)에 위폐가 모셔져 있으며, 남원시 주천면 종가에서는 별묘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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