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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558
한자 內村書堂
영어음역 Naechon Seodang
영어의미역 Naechon Village School
이칭/별칭 호운서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137[정령치로 201-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찬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당
건립시기/일시 1817년연표보기
정면칸수 5칸
측면칸수 2칸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137[정령치로 201-5]지도보기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설립되어 운영된 사립 초등 교육 기관.

[개설]

내촌서당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서 풍천노씨(豊川盧氏) 가문에 의해 설립된 사립 초등 교육 기관으로 『사자소학』과 『사서삼경』 및 『명심보감』 등의 유학을 가르친 사립 초등 교육 시설이다.

1600년대부터 남원에서는 풍천노씨 일가의 정착에 의한 유림의 등장과 더불어 주변의 용호서원원동향약의 활성화에 따른 기초 초등 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남원시 원천방에 1817년 풍천노씨 가문의 자제 교육과 지역 서민층의 학동 교육을 위해 내촌서당 등 서당 2곳이 설립되었다. 1992년 발행된 『남원지』 기록을 보면 난사 김사문이 당시 훈장으로 초빙되어 아이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위치]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마을회관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변천]

1817년에 최초로 건립, 운영되었고 1965년까지 운영되었던 서당이다. 내촌 지역은 약 300년 전 경주정씨(慶州鄭氏)가 마을을 이룬 후 연안김씨(延安金氏), 풍천노씨 일가가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로서, 지리산 구룡계곡의 초입에 위치한 탓에 산수가 수려하여 많은 선비들이 심신 휴양 및 학문 교류의 장소로 널리 이용했던 곳이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 구역 통합 때에는 내촌 지역이 육모정지리산 등과 가까워 주변 경치가 좋다고 하여 ‘호경리’로 통합, 개칭되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유림들이 학문 강학 장소로 삼았고, 동편제 판소리 등의 민속 예술의 발상지가 되었다.

따라서 수백 년째 내려오는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일대의 원동향약소를 비롯하여 마을의 유림에서 직접 관리하는 교육 시설인 내촌서당 또한 용호서원, 용호정, 육모정 등의 영향으로 지역 초등 교육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는 당시 남원도호부 원천방 최대의 규모로서, 원천방의 선비들이 상당수가 시서화를 즐기고 풍류를 즐기며 유학을 배운 기록을 보아 내촌서당의 역할은 상당하였을 것이다.

또한 내촌서당 가까이에 원동향약용호서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내촌서당을 마치고 지역 향촌 양반 사회로의 편입이 곧바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아 마을 유림 내에서도 내촌서당용호서원, 원동향약을 주요 교육 시설로 여겼을 것이다.

이는 풍천노씨 가문의 호운(湖雲) 노한원이 내촌서당을 설립했다는 『호운실기』 기록에서 증명이 되고 있다. 특히 난사 김사문 등이 아이들을 훈도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내촌서당은 1965년까지 운영되어 아직도 내촌서당에서 공부를 한 지역 주민이 존재할 정도로 평판이 좋았다. 서당집과 서당답이 1990년대까지 5두락이 있었다고 하며, 서당계가 운영되어 장학답을 통해 많은 장학생을 배출하였고 많은 후학들이 양성되었다.

[형태]

내촌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로 정면 가운데 칸에는 우사가 있었으며 양쪽으로 방이 2칸씩 존재하였다.

[현황]

현존 시설은 전무하다. 서당 터에 현재 가옥이 들어서 있으며 풍천노씨 가문의 설립자의 후손들이 주거한다. 건물은 1992년까지 잔존하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내촌서당은 남원시 원천방 내촌마을에서 큰 교육의 요람 역할을 해온 서당이다. 호운 노한원이 설립하여 한문을 가르친 심사문과 서예와 예절을 담당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월초를 훈장으로 모시고 향촌 초등 교육을 담당하였다.

특히 마을 입구의 심사문의 비석이 증명해 주고 있듯이 많은 후학을 배출하여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일대를 학문과 문화 예술의 현장으로 바꾸어놓은 가교 역할을 하였다.

서당은 보통 1월 15일에서 12월 20일까지 운영되었다. 학채는 쌀 반 가마에서 한 가마 정도 했으며 생활 보호 대상자 층에 속한 극빈 가정 자제들에게는 면제해 주었다.

서당에서 배우는 어린이들은 오전 중에 학업을 했으며 청년들은 오후나 밤에 학업을 계속하였다. 매달 1회씩 시험을 치렀으며 그 시험에 장원을 한 학동들은 부모에게 고지하고 떡이나 떡국을 서당계에서 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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