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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070
한자 三一運動
영어음역 Samil Undong
영어의미역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남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독립운동|만세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4월 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4월 4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동해골[배화동]
관련인물/단체 이석기

[정의]

1919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일어난 범군민 항일 독립만세 운동.

[개설]

1919년 4월 3일에 이석기(李奭器) 덕과면장의 주도로 전라북도 남원 군민이 궐기한 항일 독립 만세운동이다.

[목적]

전라북도 남원에서도 거족적인 민족 운동에 동참하여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찾고자 하였다.

[발단]

1919년 3월 2일 서울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는 오수에 사는 천도교 전도사 이기동(李期東)에 의하여 그날 새벽 덕과면 사율리에 거주하는 이기원(李期元)·황석현(黃錫顯)·황동주(黃東周)에게 전해졌다.

이기원은 독립선원서 40장을 전달받아 남원읍 금리에 있는 천도교구로 찾아가 교구장 유태홍(柳太洪)에게 전달했다. 또 교인 유석(柳錫)·김성재(金性在) 등 8명으로 하여금 독립 선언서를 군내 각 마을에 배포하도록 협조를 구하였다.

특히 황석현은 이기동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보절면의 천도교인 김덕인(金德仁)과 함께 그날 밤 보절면사무소와 헌병분견대 앞 게시판에 부착하였고, 황동주는 사매면의 천도교인 문경록(文璟祿)과 함께 야음을 틈타 면의 곳곳에 붙임으로써 면민들로 하여금 3·1운동의 거족적인 의의를 주지시켰다.

그러나 일제 관헌들의 엄한 경계와 감시로 집단적인 거사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3월을 넘기고 말았다. 이러한 정황에서 당시 덕과면장 이석기는 일제하의 면장직을 부끄럽게 여기던 차에, 이 기회에 구국을 위한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내 이석기의 기발한 계획과 주도로 남원에서 3·1운동이 불붙게 되었다.

[경과]

이석기는 오수보통학교에 교사로 재직 중인 조카 이광수를 불러 상의하며 은밀히 만세운동 준비에 들어갔다. 격문의 초안과 군내 각 면의 면장에게 보낼 호소문을 작성하고, 면내 구장회의를 주재하는 등 1919년 4월 3일 식목일을 기해 덕과면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3월 31일 밤에는 이석기 사랑방에서 이형기·이성기·이두기·이범수와 함께 사매면에서의 만세운동도 계획하였다. 4월 3일 덕과면민은 나무를 심기 위해 동해골로, 사매면민은 도로 보수를 구실 삼아 오신리 계명당 고개로 모였다.

그날 이석기의 선창으로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500여 군중이 사매면 헌병주재소로 진출하였다. 같은 시각에 사매면민들도 이에 합류하여 시위 면민은 800여 명이 되었다.

사매면 헌병주재소는 군중을 해산시키지 못하자 남원헌병대에 연락하여 오후 6시경 10여 명의 헌병들이 무장하고 달려와 군중을 향해 발포하였다. 이 결과 이석기 면장을 비롯하여 조동선·이재화·김선량·이풍기·이승순 등이 체포되고, 면민들은 일단 해산하였다.

이어 이성기·이두기·이범수·장경서 등은 4월 4일 남원 장날에 다시 궐기할 것을 결의하고 재차 시위 준비에 착수하였다. 4월 4일 남원 시장 안에 수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오후 2시경 이두기의 만세 선창으로 군중들은 총궐기하였다. 일부 광한루 광장에 모인 군중도 같은 시각에 시위를 벌였다. 이에 증파된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결과]

시위 현장에서 방극용(房極鎔)이 흉탄에 맞아 희생되었고, 주생면의 방진형(房鎭炯)·방양규·방제환, 남원읍의 방명숙(房明淑)·김공록(金公祿) 등 8명이 순절하였다. 또한 사매면의 정한익, 왕정리의 황찬서(黃贊西), 동충리의 이일남(李一南) 등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성기·황일환·이형기·이두기·유창근·김해근·천년도·형갑수·형광욱 등 수십 명이 체포되었고, 이석기·조동진·이풍기·이승순 등 4명은 광주지법 남원지청에서 1년 반씩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1919년 4월 3일 덕과면 만세 시위는 남원군민들에게 크나큰 자극을 주었으며, 그 후 남원군민의 애국심은 일제 무력 앞에 굴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독립의지는 군 단위 농촌지역까지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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