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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506
한자 杏亭里
영어음역 Haengjeong-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정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행정리
총인구(남, 여) 165명(남자 86명, 여자 79명)[2014년 12월 31일 기준]
가구수 77세대[2014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행정리가 형성될 초기에 마을 일대에는 은행나무가 숲을 이루어 풍치가 아름다워 사람들은 이곳을 은행마을 또는 은행골이라 하였다. 그 후 은행골을 한자로 옮기면서 은행리가 되었는데, 이를 행정으로 줄여서 부르고 있다. 엄계리는 이 지역에 최초로 정착한 선비 엄씨가 낚시하던 시냇가라 하여, ‘엄할 엄(嚴)’자와 ‘시내 계(溪)’자를 합해 엄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행정리는 1769년경 풍산유씨가 터를 잡고 살다가 모두 준향리로 옮겨 가고 그 뒤 들어온 창녕조씨들이 이곳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어 김씨, 최씨, 정씨가 차례로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번성하였다. 본래 운봉의 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엄계리 일부가 병합되어 행정리가 되었다.

엄계리는 1674~1720년경 영월엄씨가 세상의 명예와 속세를 멀리하고 깊은 산중인 이곳에 숨어 마을 앞 시냇가에서 낚시하는 것으로 소일하며 움막을 치고 거주하였다. 이후 사람들이 모여 들어 서씨, 유씨, 임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운봉의 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엄계리 일부가 행정리와 병합되어 행정리에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세걸산(世傑山)에서 발원하는 공안천고리봉, 수정봉(水晶峰)의 분수령에서 흘러내리는 주촌천이 합류하는 지점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공안저수지덕산저수지의 풍부한 물로 농사에 어려움이 없으며 해발 고도는 500m이다.

[현황]

행정리는 남원소재지로부터 주천 방향으로 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세가 유순하고 풍부한 농업용수로 농사에 어려움이 없어 마을 인심이 대대로 순후하고 평안하며, 효심이 지극한 마을이다.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77세대에 165명(남자 86명, 여자 7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경지 면적 총 39.7㏊ 중 밭이 10㏊, 논이 29.7㏊를 나타낸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요 소득원은 쌀이다. 행정리 한쪽에는 특이한 형태의 동산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를 행정숲이라 부르고 있다. 행정숲에는 절반은 소나무가, 나머지 절반은 키가 큰 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엄계리는 총 36세대에 78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경지 면적 총 40.4㏊ 중 밭이 8.6㏊, 논이 31.8㏊를 나타낸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요 소득원은 쌀이다.

1977년 15m 길이의 엄계교가 가설되었으며 1993년 마을회관이 건립되었다. 1996년 고랭지 배추를 이용한 춘향골맛김치 공장이 준공되었으며 1997년에는 지리산 화훼영농법인이 설립되었다.

엄계리는 활의 형국이라 해서 ‘활터’라고도 하여 마을 앞 도로가 화살이라고 한다. 지형은 지리산 맥이 고리봉을 타고 수정봉으로 이어지면서 행정리 황새봉을 거쳐 엄계리로 내려온다. 다시 마을을 감싸 안고 돌아 마을 끝 북쪽에 기를 모아 댓봉을 밀어 올리면서 내달아 마산 천마봉에서 멈춰 선다.

지기(地氣)를 지리산 정기로 보는 이유는 고리봉과 원평마을 뒷산 덕음봉을 경계로 주촌천운봉 광천의 분수계가 분리되는데 이는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원평마을 입구에 쇠말뚝을 박아 지기를 끊으려 했다고 한다.

여원치 남쪽에는 주지암(住智庵)이 있는데 이 지명 유래가 바로 지리산이 주지암까지 이어져 멈춘 자리라는 데서 연유한다. 이러한 지맥의 형성 과정에서 엄계리 주변에는 정승이 날 묘자리(음택)와 집자리(양택)의 명당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는 것을 두려워 한 중국 조정에서는 이름난 도사를 시켜 조선의 지형도에 붓으로 혈을 끊도록 하여 지금껏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는 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황새봉에는 김진사 묘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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