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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480
한자 池塘里
영어음역 Jidang-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정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총인구(남, 여) 대지리 139명(남자 74명, 여자 65명)[2014년 12월 31일 기준]|소지리 110명(남자 46명, 여자 64명)[2014년 12월 31일 기준]|효동리 57명(남자 25명, 여자 32명)[2014년 12월 31일 기준]
가구수 대지리 68세대[2014년 12월 31일 기준]|소지리 64세대[2014년 12월 31일 기준]|효동리 26세대[2014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지당리는 마을 한복판에 연못이 있어 지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큰 연못이 있고 마을이 자리 잡은 주변도 넓어 지당리라 부르게 되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지당은 마치 연꽃이 만발한 형국이므로 연못이 있어야 명당의 발복을 받을 수 있다 하여 이러한 지명을 갖게 되었다고도 한다.

대지는 큰마을(큰몰), 소지는 작은마을(작은몰)이라고도 전해 왔으며, 진씨와 방씨가 많아 일명 진방골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큰 연못이 있었으며, 소지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작은 지당이라 하여 지금은 소지리라 부르고 있다. 효동리는 원래의 마을이 솥 형국인지라 솥터라고 했다.

[형성 및 변천]

원래 남원군 주포면 지당리 지역으로 큰몰, 또는 대지라 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유천리 일부와 흑성면 백평리, 척동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지당리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의 정확한 형성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체로 고려 후기 남원진씨와 남양방씨가 처음 정착하였고, 그 후 남원윤씨가 입주하였다. 그러나 진씨와 방씨는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고, 지금은 윤씨가 마을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소지리가 형성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 후기에 남양방씨와 남원진씨가 제일 먼저 정착해 살았으며, 조선 말기에 경주김씨, 문화유씨 등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지금의 소지리를 형성하였다.

소지리는 원래 남원군 주포면 지당리 지역으로 작은물, 진방골, 또는 소지라 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유천리 일부와 흑성면 백평리, 척동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지당리에 편입되었다.

1982년 이 마을 방인원의 주택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조각이 발견된 것을 보면 확실한 연대는 잘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효동리는 1749년(영조 25) 당시 호족 양대박의 9대손 양원규와 왕족인 효령대군의 후손 이회원이 최초로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양원규는 본래 주생면 상동리에 거주하였고, 위로 8대에 걸쳐 벼슬을 했으나 조부 때부터 등과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충청도 어느 도사의 의견에 따라 뒷산이 밥주걱 모양으로 움푹한 솥터에 자리 잡으면 후손이 벼슬할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을 믿고 이곳에 자리 잡아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회원은 본래 임실군 둔남면에 거주했으나 생활이 어려워 어린 시절 양원규 집에 의탁하였다. 그런데 명문의 자제로 품행이 뛰어나 양문에서 데릴사위로 맞이하고 남매와 함께 이곳으로 와 살기 시작하여 이 마을의 정착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효동리는 본래 남원군 주포면 지당리 지역으로, 솥터, 솥텡이, 또는 원회동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흑성면 백평리, 척동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지당리에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평야 지대로 토질이 비옥하고 송림으로 덮여 있다. 마을 앞에는 옥율천요천이 합류하고 있다.

[현황]

대지리는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68세대 139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자가 74명이며, 여자는 65명이다. 경지 면적은 32.1㏊로 밭 3㏊, 논 29.1㏊이고, 임야는 지당리 전체가 81.9㏊이다. 미곡 위주의 논농사를 하고 있으며 주요문화재로 지당리 석불입상이 있다. 공공기관으로 KBS남원방송국 주생송신소가 있다.

소지리는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64세대 11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남자가 46명, 여자가 64명이다. 경지 면적은 41.9㏊로 밭이 3.9㏊, 논이 38㏊이고, 임야는 지당리 전체가 81.9㏊이다.

일제강점기 말기까지만 해도 완고한 반촌으로 한학 교육에 치중하였던 곳이다. 소지리는 본래 반촌이요, 유교 사상이 농후하고 한학이 완성된 마을로서 예로부터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또 명당촌으로 남원에서 두 번째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마을이 마치 광주리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을에 들어서면 매우 포근한 느낌이 드는 곳으로, 예로부터 큰 부자와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인심이 순후하고 협동과 단결이 잘 되고 있다.

환경 개선 사업으로 전원 도시로 탈바꿈한 소지리는 남원에서 두 번째 가는 명당촌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형학적으로 용두정과 침정이 청룡 구실을 하고, 한편으로는 남원의 물막이 구실을 하고 있다.

뒷산 기슭에는 수덕봉이, 앞으로는 지당리 석불입상(지방유형문화재 제47호)이 서 있고, 통일신라 당시에는 사찰이 있었던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본래 주포면의 소재지로 면사무소, 농촌 지도소가 있었다.

주업은 농업이며 1992년 73㏊의 농토가 경지 정리되어 기계화 영농이 가능하게 되었고 노인 복지를 위해 1995년 모정 1개소를 건립, 노인들의 휴식처로 활용하고 있다.

효동리는 26세대 57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남자 25명, 여자 32명이다. 경지 면적은 22.5㏊로 밭이 2.5㏊, 논이 20㏊이고, 임야는 지당리 전체가 81.9㏊이다.

1910년 경술년 물난리에 가옥 12동이 유실되어 마을이 가난해지자 솥터의 솥이 모두 비어버렸다는 의미로 솥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러다가 1948년 이후 효자가 많이 나온 마을이란 뜻으로 효동(孝洞)으로 바꾸었다.

원래 효동리는 1910년 물난리로 가난을 면치 못하였으나 광복 후 다시 부자 마을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5년 마을회관을 건립하고, 동구 앞에는 버드나무가 녹음이 우거져 무성히 자라고 있다.

효동리는 동향(東向) 마을로 주생면의 첫 관문에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우로는 남원~곡성 간의 국도가 백호(白虎) 구실을 하고, 좌로는 전라선의 철도가 청룡 구실을 하며, 수덕봉은 현무(玄武)요 옥율천은 주작(朱雀)이니 그야말로 명당 마을이라 할 만하다.

김씨 열녀비가 마을 입구에 있다. 마을 이름이 효자가 많이 나와 효동이라 했다고 하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효자로는 양상걸(梁相傑), 일명 양원일이 있다. 주요 기업으로 한일철망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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