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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374
한자 新陽里
영어음역 Sinyang-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신양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병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2.59㎢
총인구(남, 여) 124명(남자 64명, 여자 60명)[2014년 12월 31일 기준]
가구수 63세대[2014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에 속한 법정리.

[개설]

신양리는 비촌리와 양선리·작소리를 행정리로 포함하고 있다.

[명칭유래]

남원의 적과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비내리·양선리·신촌리·오현리·작소리의 일부를 병합하고, 신촌과 양선의 이름을 따서 신양리라 하였다.

비촌리는 조선 말기에 정착한 광주이씨 후손들이 마을 변두리에 담을 치고 출입하는 사립문을 만들고 한 집안과 같이 우애 있게 살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사립안’이라 하였는데, 사립안은 한문으로 옮길 때 ‘사립 비(扉)’자와 ‘안 내(內)’자를 써 비내가 되고, 창촌과 합하여 ‘비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선리는 보절면 북쪽 성산 줄기에 계룡산이 있어서, 아침해가 뜰 때 이 마을이 제일 먼저 햇살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양선(陽先)이라 부르게 되었다. 작소리는 창령성씨들이 살고 있을 때, 그들의 부귀가 극에 달하여 곡식 저장고인 노적 위에 까치가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까치골이라 하다가 한문으로 ‘까치 작(鵲)’과 ‘집 소(巢)’를 합하여 작소라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비촌리는 조선 전기인 1390년경, 고려 왕족이었던 왕씨(王氏) 일가가 옥씨(玉氏)로 성을 바꾸어 피신하여 숨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그후 1400년경 진주소씨가 입주하여 살다가 얼마 후에 떠났고, 조선 말기 광주이씨 이명천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선리는 조선 전기인 1400년경 진주소씨가 처음 입주하였다가 인근 도촌마을로 옮겨 갔고, 그후 해주오씨가 입주하여 살던 중 풍양조씨가 1590년에 관직을 잃고 낙향하여 현재까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작소리는 성산문의 후예인 창령성씨 일가가 터를 잡아 살다가 1400년경 진주소씨가 이주해 오자 성씨들은 장수 방면으로 이주하고, 소씨가 흥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남원의 적과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덕과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남원시·남원군 통폐합 때 남원시 덕과면 신양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비촌리는 마을 앞으로 섬진강 상류인 만도천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율천마을, 북쪽으로는 양선마을과 연결되어 있다. 해발고도 150m로 산이 총 면적의 67.5%를 차지하고 있고, 거의가 붉은 송림으로 형성된 아름다운 마을이다.

양선리는 아침 해가 솟는 모습이 제일 먼저 보이는 계룡산이 북쪽 1㎞ 지점에 솟아있고, 동편으로는 하천이 흐르는 동향 마을로서 마을 앞에 군도 보절선이 통과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사율리율천과 사곡으로 연결되어 있다.

작소리는 덕보교 다리를 중심으로 보절면 황벌리덕과면으로 분리되며, 도로 옆으로 조그만 냇가가 흐르고 있는 작은 마을로 연결되어 있다. 마을 뒤로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냇가가 흐르는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현황]

신양리의 면적은 2.59㎢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63세대, 124명(남자 64명, 여자 6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 소득원은 미맥 위주의 농림업이며, 일부 농가에서 축산업과 약초 재배 등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국도 17호선에서 군도 14호선을 따라 5㎞ 정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보절면이 생활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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