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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354
한자 城侍里
영어음역 Seongsi-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성시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소강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3.73㎢
총인구(남, 여) 126명(남자 68명, 여자 58명)[2014년 12월 31일 기준]
가구수 64세대[2014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성시리는 성남리와 성북리·계월리 등의 행정리를 포함하고 있다. 남원시의 최북단 오지마을로 보절면의 면소재지인 상신리에서 북쪽으로 6㎞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을 조그마한 산들이 에워싸고 있어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 반월성을 연상케 한다.

[명칭유래]

본래 남원군 보현면 성리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성리와 시동리·사촌리·외항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성리와 시동의 이름을 따서 성시리라 하였다.

성남리와 성북리·계월리의 명칭유래를 보면, 고려 전기에 축성된 성산산성을 중심으로 성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성내미·성남이라 하고, 북쪽에 위치한 마을을 성북이라 하였다.

계월리는 마을 뒷산이 달 속의 계수나무 형국이라 하여 계월이라 하였다. 계월이란 지명 이전에는 시묘동이라 했다. 진양강씨 후손 중에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도 효성이 지극하더니 그 부모가 죽자 여러 해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 ‘모실 시(侍)’자와 ‘무덤 묘(墓)’자를 넣어 시묘동이라 불렀다.

[형성 및 변천]

성남리에서 전해 오는 구전에 의하면, 고려 중기 몽골족의 계속된 침입을 막기 위해 성남마을 뒷산인 성산에도 주위의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성을 쌓고 성주에 하씨 장군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연속된 주둔으로 장기간 이곳에 머물게 되자 장군의 가족이 살던 고향에서 이거하여 같이 살다가, 하씨 일족은 떠나고 하씨의 사위인 강씨만 남아 남북촌에 90여 호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성북리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4백여 년 전 진주강씨 후손이 정착하였고, 1800년대에 연안김씨 김천열이 마을 터를 잡아 차차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후 이씨, 양씨가 다소 이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계월리는 1590년대에 강윤형이 무안현감 재임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피난길에 나섰다가 외부로부터 잘 보이지 않은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1600년대에는 호조참판 김수훈이 김해에서 퇴관 후 경기도 장단을 거쳐 산이 순조로운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후 1800년대에는 흥덕장씨 장진열이 장수와 산서를 거쳐 이곳에 머물러 현재까지 3개 성씨가 대종을 이루어 살고 있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남원군 통폐합 때 남원시 보절면 성시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성남리와 성북리는 마을 뒤로 성산이 있고, 앞으로는 넓은 경지가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로 성시천이 흐른다. 계월리는 뒤로는 장수군 상서면과, 앞으로는 보절면 사촌리와 접하고 있다.

[현황]

성시리의 면적은 3.73㎢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64세대, 126명(남자 68명, 여자 5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 소득원은 미맥 위주의 농림업으로, 야산을 개발하여 고추·수박 등 원예 작물도 재배하고 있으며 한봉도 사육하고 있다. 일부 농가는 축산을 부업으로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시설하우스 재배도 하고 있어 농가소득에 기여를 하고 있다.

종교 단체로는 세계만민교회가 있다. 마을 앞으로 지방도 721호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시내버스 등이 수회 운행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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