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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917
한자 宗敎
영어공식명칭 Religion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원영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행하여지는 신앙 행위의 총칭.

[개설]

경상남도 밀양시에서는 삼한시대 이전부터 종교 활동이 전개되어 왔으며,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와 고려시대 널리 퍼진 유교, 개항기에 유입된 천주교와 기독교가 활동하고 있다. 이 밖에 여러 신종교도 활동하고 있다.

[원시 종교]

밀양 지역에서는 정치체의 발생 이전인 선사시대를 비롯하여 최초의 정치 집단인 변진의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 형성되었을 당시에도 원시적인 종교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 시기 종교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 등의 물질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서 당시의 종교 활동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의 고인돌이나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의 고인돌 등의 유적을 통하여서 신앙과 관련된 의례가 행하여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밀양 지역에는 불교가 도입되었다. 처음 도입된 불교의 성격에 대하여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다른 지역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업설(業說)에 기초한 양재초복(禳災招福)의 성격을 띠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은사(父恩寺)만어사(萬魚寺) 전승 설화를 바탕으로 가야시대에 불교가 도입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근거가 없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영정사(靈井寺), 무봉사(舞鳳寺), 석골사(石骨寺) 등 여러 사찰이 창건되어 밀양 지역에도 불교가 융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불교 신앙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고려시대에는 만어사, 천주사(天柱寺)[또는 죽암사(竹巖寺), 천죽사(天竹寺)] 등의 사찰이 건립되었고 밀양시 청도면밀양 소태리 오층석탑, 밀양시 삼랑진읍밀양 만어사 삼층석탑, 밀양시 삼랑진읍밀양 숭진리 삼층석탑 등 불탑과 밀양시 활성동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승탑 등의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밀양 지역에는 불교의 교세가 왕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불우조(佛宇條)에 영정사, 만어사, 안수사(安水寺), 봉천사(鳳泉寺), 용천사(湧泉寺), 영은사(靈隱寺) 등의 사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83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 밀양 편에는 불우조에 엄광사(嚴光寺), 부암사(父菴寺), 표충사(表忠祠), 영정사, 석골사, 만어사, 봉천사, 영은사, 안수사 등이 기록되어 있다.

2022년 말 현재 밀양시에는 212개소의 불교 사찰이 등록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전통 사찰은 8곳이다.

[천주교]

밀양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를 피하여 기호지방의 신자들이 남쪽으로 남하한 것이 계기였다. 1815년 경상남도 언양군 상북면 등억리 내간월 불당골에 경상남도 최초의 신자 공동체로 간월공소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1827년 밀양군 하동면 우곡리에 웁실공소, 1839년 언양에 탑곡공소[현 경상남도 울주군 언양읍], 1840년 대재공소[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가 설립되었다. 공소 설립이 활발하여진 것은 1839년 기해교난 이후였다.

1866년 병인교난이 일어난 후 많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다 투옥되었는데, 이때 지금의 밀양시 하남읍 출신인 신석복은 대구감영에 압송되어 자신의 신앙을 지키다 순교하였다. 1897년 우리나라에서 서품된 첫 사제이며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은 한국인 세번째 신부인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가 첫 부임지로 밀양성당의 사제로 부임하였다.

밀양성당 출신의 첫 사제는 류흥모[안드레아] 신부였다. 1926년에는 한 해에 밀양성당 출신의 사제가 세 사람 배출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천주교는 성당의 확장, 성모성심유치원 설립, 성모성심병원 개원, 레지오 마리애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창단, 세종중고등학교 인수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성가대 연주회, 우리밀 살리기 운동, 경로위안잔치, 중국 교포 노동자 돕기 모금, 아프가니스탄 어린이 돕기, 성심노인대학 개교 등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2022년 현재 밀양 지역의 천주교 관련 시설은 삼랑진성당, 오순절 평화의 마을, 수산성당, 천주교마산교구 명례성지, 밀양가르멜여자수도원, 순교자김범우기념성모동굴성당, 밀양성당 송백공소, 맑은하늘피정의 집, 밀양천주교 외산공소, 밀양천주교 남산공소, 밀양천주교 무안공소, 밀양성당, 남밀양성당 등이 있다.

[유교]

밀양에 유교가 널리 도입된 것은 지방에 향교가 설립된 고려시대였다. 고려 왕조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각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적극적인 유학 교육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군현제의 재정비와 아울러 향교의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강화하였다. 밀양향교는 고려 전기 설립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실질적인 기능은 조선시대에 이루어졌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사성(四聖)과 십철(十哲) 등 성현을 받들고 유학을 공부하는 생도를 양성할 뿐만 아니라 밀양 지역의 풍속과 교화를 담당하였던 유교의 전당이었다. 밀양은 일찍부터 ‘선비가 많기로 촉군(蜀郡)과 같고 풍속이 순후한 예절의 고장’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밀양향교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였다. 점필재는 영남 유학의 창시자라 할 만한 인물이다. 점필재는 밀양의 풍습을 교정하고 젊은 인재들을 양성하기에 진력하였다. 향사당을 기반으로 향헌, 향약을 실시하고, 향촌 사회의 친목과 교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유생들의 양성은 쇠퇴하여고 선현에 대한 춘추향사(春秋享祀)로 명맥을 이어 나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에 밀양 유학의 전통을 되찾고 그 의의를 살리기 위하여 명륜학원을 부설하기도 하며 유학 부흥에 힘쓰고 있다.

밀양 유교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밀양시 부북면점필재 김종직 생가, 점필재 김종직우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을 배향하는 부북면예림서원(禮林書院), 일직손씨(一直孫氏) 5현을 모신 밀양시 산외면혜산서원(惠山書院) 등이 있다.

[기독교]

경상남도 밀양에 기독교가 전하여 것은 조선 말기였다. 1893년 장로교에 소속된 선교사였던 윌리엄 베어드(William Baird)와 베어드를 도와 일하던 서경조(徐景祚)에 의하여 전래되었다.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많은 신도를 지니고 있는 감리교는 1950년 이후에 들어왔고, 성결교는 1918년에 밀양에 전파되었다.

밀양에 교회가 처음 세워진 것은 1893년 전래 이후 4년 후에 1897년이었다. 경상북도 청도 출신 김경수의 전도에 의하여 밀양 춘기동 김희복의 부인 최경수가 믿음을 가지면서 춘화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 1940년 양효교회, 비슷한 시기에 밀양 마산교회가 설립되는 등 1910년까지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밀양의 기독교계는 일제강점기 3·1운동에 앞장서기도 하고, 의열단 활동에 동참하기도 하면서 독립운동에 기여하였지만, 일본의 신사참배에 찬동하여 신도들에게 독려하는 굴종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가기도 하였지만 신사참배의 후유증이 나타나는 등 교회의 정화 및 재건 과정에서 교회 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밀양에는 밀양시 교회 연합회가 있어 함께 부흥회도 열고, 부활절 연합예배도 드리고 있지만 강단 교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에 대한 분명한 정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22년 현재 밀양의 교회는 126개소가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신종교]

신종교로는 한국 SGI, 여호와의 증인, 세계구세교, 천부교, 증산도, 대순진리회 등이 각각 회관과 도장, 밀양연락소 등을 갖추어 활동하고 있다. 또 원불교는 밀양교당, 수산교당, 삼랑진교당이 있으며 원광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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