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0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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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禮山-李存昌生家攄 |
이칭/별칭 | 여사울성지,이존창 생가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05-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한성준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9년 06월 18일 -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 발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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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를 천주교 대전교구가 성역화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2년 -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 성지 개발 진행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8년 12월 22일 -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
소재지 |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05-3 |
출토 유물 소장처 | 절두산순교자박물관 -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6[합정동 96-1] |
성격 | 생가 터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있는 천주교 성지.
[개설]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는 충청도 지역에 처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한 이존창(李存昌)[루도비코, 1752~1801]의 생가 터이다. 여사울은 충청도 천주교회의 발상지이며, 한국 천주교회 역사의 중심지이다. 바로 앞으로 무한천이 꾸불꾸불 흐르면서 ‘여사울 포구’가 있었다.
이존창은 농업과 숙박업, 선박업 등에 종사한 것으로 파악되는 부유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분 상승을 위한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남인 계통의 이기양에게 학문을 배웠다. 1776년 경기도 이천에 살던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문하에 들어갔다. 1784년 베이징에 다녀온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스승 권일신의 권유로 이존창은 1785년 세례를 받았다. 이존창은 초기 천주교회의 중심 인물인 권일신, 이승훈, 이벽 등과 함께 가성직단(假聖職團)[평신도들 간에 사제를 선출하여 미사와 성사를 집행하였던 일]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존창은 고향 충청도 지방 선교의 사명을 받고 내려와 여사울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에 전력하였다. 그 결과 300여 명의 신자가 생겨났고, 나날이 교세가 커져 내포 지방은 ‘신앙의 못자리’로 자리 잡아 갔다. 이때 최초 사제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의 가문에도 전교를 하게 된다. 또한 초기 교회가 가성직제도의 잘못을 깨닫고 사제 영입을 추진하자, 재정적으로 후원하여 중국인 사제 주문모(周文謨)[1752~1801]를 맞이하는 데 한몫하였다.
1874년 프랑스의 달레 신부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도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이존창이 입교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다.”고 쓸 정도로 이존창이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그러나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배교하였다. 출옥 후 양심의 가책에 눌려 괴로워하다가 다시 전교(傳敎)에 나섰던 이존창은 내포 지방을 떠나 부여 홍산, 이어서 금산, 고산으로 이사를 다니며 전보다 더욱 열심히 전교에 힘썼고, 피의 순교로 속죄할 것을 다짐하였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서울로 올라가 많은 도움을 제공하고 홍산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체포되어 천안에서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로 압송되어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4월 최창현,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 민중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라.”는 조정의 결정에 따라 공주로 이송되어 황새바위에서 참수 치명(致命)하였다.
[변천]
100년에 걸친 천주교 박해 시대에 여사울에는 표면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남아 있진 않았지만, 비밀 신앙 공동체가 활동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5년의 연말 순회보고서를 보면, 병인박해의 풍파를 겪고 나서도 내포 지역에는 많은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사울 신앙 공동체는 1890년 내포의 양촌[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과 간양골[현 예산읍 간양리 계곡]에 본당이 설립되었을 때, 간양골 본당 주임 파스키에 신부의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여사울은 내포 천주교회의 중요한 성지(聖地)로 인식되어 왔다.
1983년 천주교 대전교구는 이존창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신암면 신종리 이존창의 생가 터를 매입하여 ‘선각자 이존창 송덕비’와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생가 터 안내문’ 간판을 세우고 성역화하기 시작하였다. 1994년 돌로 된 제대(祭臺)를 설치한 이후 별다른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2002년 신례원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최교성[세자 요한] 신부의 주도로 주변의 토지를 추가 매입하고, 전국적인 후원자를 모집하는 등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진행되었다. 2004~2005년 강당을 건립하고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확장하였으며, 2006년 ‘십자가의 길’을 완성하고 예산군의 지원을 받아 우회 진입도로를 신설하였다. 2008년 여사울성지성당이 분리됨으로써 여사울은 합덕의 솔뫼 성지, 신리 성지와 더불어 한국천주교회의 중요한 성지로 자리 잡았다.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는 2008년 12월 22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는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69년 6월 18일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 구자오 신부의 주도로 ‘여사울 이존창 생가 터’를 발굴한 결과 십자가 1점, 묵주패(默珠牌) 3점, 성해통(聖骸桶) 1점 등이 발굴되었다. 출토품은 모두 1801년 신유박해 전후에 중국에서 제작되어 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여사울 출토품이, 이존창이 자신의 집에서 교우들과 함께 하는 공식 전례 예절 때와 예비자들을 교리 교육할 때 사용하다 신유박해로 체포되기 직전, 성물 훼손과 압수를 방지하기 위해 아궁이나 땅속에 몰래 숨겨 둔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품 중 가로 7㎝, 세로 15㎝의 철제 십자가는 예수상 아래에 해골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성해통 안에는 성모상[무염시태상]이 정교하게 부조되어 있으며, 묵주 3점 중 2점은 묵주알은 모두 없어졌고 쇠줄과 성모패만 남아 있다. 출토품은 100여 년간 지속된 박해의 풍상을 보여 주고 있다. 예산여사울이존창생가터 출토품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순교자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현황]
초대 여사울성지성당 주임 사제는 장동준[라파엘] 신부였고, 2013년 2대 윤인규[라우렌시오]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2015년 3대 최석영[이냐시오] 신부가 부임하여 여사울에 사는 신자들과 전국에서 오는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사목(司牧) 활동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옛 여사울공소강당을 성지성당으로 사용하다가, 2010년 이존창 생가 터 바로 앞에 유럽풍의 성지성당을 신축하였다. 2002년부터 시작된 성역화 사업은 2008년 성지성당 분리 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새로운 안내판과 돌제대 등이 설치되었다.
[의의와 평가]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로 불린 이존창의 생가 터가 있는 곳으로, 내포 천주교회의 발상지로 한국천주교회의 중요한 성지이다. 박해 시대에는 천주교 신앙의 뿌리였고, 1890년대 이후에는 초기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전통을 계승하고 선교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