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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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應魯 |
이칭/별칭 | 고암(顧菴),죽사(竹史),이응로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명진 |
[정의]
충청남도 예산에서 활동한 한국화가.
[개설]
이응로(李應魯)[1904~1989]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친 한국화가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호는 죽사(竹史)·고암(顧菴)이다. 아버지는 이근상(李根商)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자결한 의병장 이근주(李根周)의 조카이다.
[활동 사항]
이응로는 1904년 1월 12일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서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지만 집안이 완고한 유교적 가풍을 지니고 있어서 화가의 꿈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응로는 1923년 열아홉 살 때 상경하여 당시 서화계의 거장이었던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의 문하에 들어가 전통 문인화법과 서예에 기초를 둔 사군자 등을 배웠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35년 일본에 유학하며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画学校]를 졸업하였고, 일본 남화(南畵)의 대가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에게 배우는 등 근대적인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은 전통적인 사군자에서 벗어나 대상을 사실주의적으로 탐구한 현실 풍경화가 주를 이룬다. 이응로는 1944년 예산군 덕산면의 수덕여관을 구입한 후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작품 활동을 하며 머물렀다. 이후에도 수덕여관과의 인연이 이어졌는데, 1968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후 잠시 귀국하여 수덕여관에서 부인과 함께 요양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덕여관에서는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고 전한다.
해방 이후 이응로는 1946년 단구미술원을 설립하였고, 1948년부터 홍익대학교동양화과의 주임교수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8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정착한 후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며 유럽 화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고, 1964년 파리 세르뉘시미술관 내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서예와 사군자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 사건 등 여러 정치적 사건들에 연루되면서 국내 활동 및 입국이 금지되자 1983년 프랑스로 귀화하였고, 1987년 북한의 초대를 받아 평양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1989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이응로 회고전이 기획되었으나 정부의 입국 금지 명령이 풀리지 않아 이응로는 한국에 들어 올 수 없었으며, 전시 첫날 파리의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이튿날인 1989년 1월 10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응로는 「청죽」[1931], 「돌잔치」[1945], 「피난」[1950], 「우후(雨後)」[1953], 「문자추상」[1964], 「무제」[1968], 「구성」[1973], 「군상」[1986] 등의 주요 작품을 남겼다. 예산군 수덕여관 앞에는 이응로의 바위 조각이 남아 있는데,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 산천에서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적 추상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주요 저서로는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1956]이 있다.
이응로는 필묵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시도와 시대정신이 투철한 작품 세계로 국내는 물론 프랑스와 유럽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동양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드높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정신세계를 접목하여 승화시킨 작품으로 근현대 미술사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묘소]
이응로의 묘소는 파리에서 활동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묻힌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응로는 1965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명예 대상을 수상하였다. 예산군 덕산면에는 1996년 11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이응로 선생 사적지가 있다. 2007년 대전광역시에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하였으며, 2011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 고암 이응로 생가 기념관이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