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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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越郡 |
영어공식명칭 | Yeongwol-gu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엄흥용 |
[정의]
강원도에 속한 법정군.
[개설]
영월군(寧越郡)은 동경 128° 06′~128° 54′, 북위 37° 01′~37° 24′에 위치하고 있다. 내륙 산간지역으로 면적은 1,127.62㎢이고, 총 경지 면적 7,013㏊ 중 논이 937㏊, 밭이 6,076㏊이다.
2021년 8월 현재 인구는 3만 8062명이고, 행정구역은 2개 읍, 7개 면에 179개 행정리와 57개 법정리가 있다. 영월군은 인구 감소와 더불어 농업 인구도 점차 고령화되는 추세이다.
[자연환경]
영월군의 북서쪽에는 백덕산(白德山)[1,426m]·두위봉(斗圍峰)[1,466m]·직운산(織雲山)[1,172m]이 있고, 남동쪽에 어래산(御來山)[1,064m]·선달산(先達山)[1,236m]·구룡산(九龍山)[1,346m] 등이 있다. 관내에는 매봉산[1,268m]·망경대산(望京臺山)[1,027m]·응봉산(鷹峰山)[1,013m]·봉래산(蓬來山)[800m]·태화산(太華山)[1,027m] 등이 솟아 있다.
하계망(河系網)은 태백산지에서 발원하여 영월을 통과하는 동강과 서측에서 흘러드는 평창강[서강]이 합류하여 남한강의 본류를 이룬다.
영월군은 산간 분지로 연평균 기온 10.8℃, 1월 평균기온 -5.7℃, 여름 최고 기온이 30℃를 넘는 내륙 산간 지역인 까닭에 연교차와 일교차가 심하고, 연 강수량은 1,000~1,200㎜이다. 임야가 전체의 85%를 차지하고 있고, 기후, 농업, 민속 문화 등에 있어서 내륙성이 강한 곳이다.
지질은 선캄브리아-고생대에 걸쳐 해침, 퇴적이 이루어진 옥천지향사동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기반암은 퇴적암류[고생대 조선계, 평안계층]가 주류를 이룬다. 조선계의 석회암 지대는 용식(溶蝕)[빗물이나 지하수가 암석을 용해하여 침식하는 작용] 지형인 카르스트(Karst) 지형이 발달되어 북면 문곡리 가느골, 주천면 금마리, 한반도면 쌍용리, 후탄리, 남면 연당리 등지에 걸쳐 원형 또는 타원형의 돌리네(doline)[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카르스트 지형에서 석회암이 물에 용해되어 생긴 원형 또는 타원형의 움푹 파인 땅] 현상이 분포되어 있다. 신생대 4기 이후 동해안의 이수 현상은 청령포, 마굿, 잔다리로 감입곡류하였던 강물의 절단으로 인하여 구하도(舊河道)가 형성된 특이한 지형을 하고 있다. 또한 주변에는 융기운동으로 인하여 과거의 하도가 높은 곳에 위치한 계단 모양의 하안단구(河岸段丘) 지형이 나타나고, 영월읍 일대의 동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침식분지 지형이 발달하여 있는 등 영월은 지형 학습의 보고이다.
[역사]
선사 시대의 유적지인 한반도면 후탄리와 옹정리에서는 찍개, 긁개, 격지 등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채집되었고, 그 외 곳곳에서 수많은 유적지가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구석기 시대부터 영월 지역에 인류가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월은 삼한 시대 진한(辰韓) 땅이었으나, 4세기 초에 한강을 점령한 백제의 영역으로 100가구가 넘는 고장이라는 뜻으로 ‘백월(百越)’이라 불렀다. 고구려 미천왕 때 ‘내생현(奈生縣)’이라 불렀고, 5세기 장수왕 때 ‘내생군(奈生郡)’이 되었다.
남한강 상류인 영월은 역사적으로 각 세력이 영토 확장을 위하여 각축을 벌였던 삼국 항쟁의 중심지였다. 영월읍 정양리의 왕검성(王儉城) 중심으로 완택산성(莞澤山城), 태화산성(太華山城), 대야성(大野城)과 단양의 온달성(溫達城), 정선의 고성(古城) 등은 이때 축조된 성으로 고구려가 신라를 막아 내는 역할을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5 잡지4에 따르면, 삼국 통일이 완성된 757년(경덕왕 16)에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쳐 통일신라 9주 5소경의 명주(溟州)[강릉]에 소속되었고, 주연현(酒淵縣)[주천]과 을아단현(乙阿旦縣)[영춘], 욱오현(郁烏縣)[평창]을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월(寧越)로 바꾸고, 995년 (성종 14)에 전국을 14도로 나눌 때 원주와 같이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 5도 양계 체제로 개편될 때 제천과 함께 양광도(楊廣道) 충주목 원주(原州)로 이속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46 영월군]에 따르면, 1372년(공민왕 21)에 영월 출신 환관(宦官) 연달마실리(延達磨失里)가 중국 명(明)에서 큰 공을 세워 영월군으로 승격하여 지군사(知郡事)가 다스리게 하였다.
1398년(태조 7) 원주의 속현인 영춘과 충청도 충주의 관할인 영월을 맞바꾸어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다. 그 후, 세조 때 지군사를 군수로 바꾸었다. 이후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왕릉이 있는 곳이라 하여 1699년(숙종 25)에 영월도호부(寧越都護府)로 승격되어 도호부사가 영월을 다스렸다[『대동지지(大東地志)』 8책].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군(郡)으로 격하되어 원주, 평창, 정선과 함께 충주부에 편입되었다. 1896년 8월 4일 13도로 개편하면서 다시 강원도 영월군이 되었다. 1906년(고종 43) 칙령 제49호[대한제국 지방구획정리 건]에 의하여 전국의 월경지를 정리함에 따라 원주에 속한 우변면·좌변면 및 수주면(水周面)이 영월군으로 이관되었다. 1914년 4월 1일[강원도령 제2호] 군면 폐합으로 수주면·하동면·상동면·북면·서면·남면은 그대로, 군내면·천상면(川上面)이 군내면(郡內面)으로, 우변면과 좌변면이 양변면으로 통합되었다. 군내면, 양변면, 수주면, 하동면, 상동면, 북면, 서면, 남면의 8면으로 개편되었다.
1915년 정선군 신동면 석항리(石項里)가 영월로 편입되었다. 1931년 양변면이 주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37년 4월 1일[강원도령 제8호] 군내면이 영월면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 1월 1일 영월면이 상동면 연하리를 편입하여 영월읍으로 승격[1읍 7면]하였다. 1963년 1월 1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의 천평리(川坪里)와 덕구리(德邱里)가 상동면에 편입되고, 수주면 강림리(講林里), 부곡리(釜谷里), 월현리(月峴里)가 횡성군 안흥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정선군 신동읍 천포리 일부를 석항리에 편입시킨 상동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하동면 정양리(正陽里)와 남면 흥월리(興月里)가 영월읍으로 편입되었고, 서면 북쌍리(北雙里)는 남면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 4월 1일 상동읍 녹전·석항 2개 출장소를 통합하여 중동면을 설치하였다[2읍 7면]. 2009년 10월 20일 단순한 방위 지명을 청산하고 지역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하동면을 김삿갓면으로, 서면을 한반도면으로 각각 명칭 변경하였다. 2016년 11월 14일 수주면이 무릉도원면으로 변경되었고, 2021년 11월 2일 중동면이 산솔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고고 역사]
영월은 산악지형과 감입곡류하천이 발달된 곳으로 석회암층군이 넓게 분포하고 있어 곳곳에 많은 동굴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영월의 자연 조건으로 일찍부터 소규모 집단생활이 가능하였다. 영월의 선사유적은 구석기 시대 유적부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강안의 단구면 혹은 완경사면에서 확인되며, 주로 찍개 등 대형석기가 수습되었다. 영월읍 삼옥리 부근 발굴 조사 결과 유물 포함층 1개소와 바위그늘 2호에서 뗀석기 120점이 출토되었다. 이외에 서면 후탄리 뒷들·옹정리 사정동, 신천2리, 남면 북쌍리 문개실·남애, 영월읍 삼옥1리·덕포리·연하리·영흥리, 주천면 용석4리 등지에서 유물산포지가 확인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주천면 주천리, 연당 쌍굴, 북면 공기리 굴앞마을 공기2굴 등에서 골각기, 조가비장식, 자라뼈, 각종 패각류, 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특히 뼈 작살은 남한에서는 출토 사례가 없어 주목되고 있다. 이외에 연당리, 방절리 바위그늘과 한반도면 광전리 등지에서는 유물산포지가 확인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적은 김삿갓면 각동리에서 간돌검[마제석검] 1점과 간돌화살촉[마제석촉] 8점이 돌널무덤[석관묘]에서 발견된 이래 외룡리에서는 고인돌[지석묘]이 발굴 조사되었다. 이후 문산리에서는 반투공한 공열토기편과 각종 석기 등이, 삼옥리 동강시스타 부지에서는 수혈유구 및 고상가옥 등의 유구에서 많은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또한 영월 법흥 하수종말처리장 건설부지 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17기와 함께 공열토기, 구순각목토기, 이중구연토기, 석도편, 환상석기편, 찰절석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연당리 쌍굴에서도 청동기시대 홍도, 민무늬토기호, 석촉, 방추차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이외에 한반도면 쌍용리, 남면 광천리 청령포, 북면 공기리, 주천면 주천리, 영월읍 방절리·영흥4리 등지에 유물산포지가 분포한다.
철기 시대 유적은 청령포의 발굴 조사에서 연질승문토기와 타날문토기편이 출토되었으며, 팔괴리 유적에서는 육각형주거지 1기와 다량의 경질무문토기편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도 삼옥리 온천 진입도로 부지 발굴 조사에서는 주거지 및 수혈유구, 고상가옥 및 역사시대의 경작유구와 주거지 등 모두 18기의 유구가 조사 보고되었다. 영월 법흥 하수종말처리장 건설부지 내 유적 발굴 조사에서는 ‘凸’·‘呂’자형 주거지 4기와 함께 경질무문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제철 관련 활동을 위한 작업장의 용도로 추정되는 슬래그와 노체편 등이 확인된 바 있다. 이외의 유물산포지로는 영월읍 문산리·삼옥1리·삼옥2리 섭새·방절리·팔괴리, 한반도면 신천1리·광전리, 남면 북쌍리·광천리 청령포, 김삿갓면 대야리·외룡리 등지에서 다수의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삼국 시대 유적은 김삿갓면 외룡리 발굴 조사에서 삼국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거지가 확인되었으며, 그 외에 김삿갓면 진별리 맞밭마을, 한반도면 신천1리 시내들 마을에서 적갈색 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관방유적(關防遺蹟)으로는 영월읍 정양리와 연하리에 걸쳐 있는 정양산성[사적], 팔괴2리 태화산성, 법흥산성, 도원산성, 김삿갓면 대야리 대야산성, 삼옥2리 완택산성 등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 유적은 대부분 불교 유적으로 흥녕선원지와 흥교사지 등이 있다. 이외에도 주천면 도천리 탑거리 사지, 법흥리사지와 주천면 신일리 망산에서 기와가 다수 확인되었다. 주거 유적으로는 영월 문산리에서 방형의 평면 형태에 ‘T’자형 구들 시설을 갖춘 수혈주거지 6기가 확인되었다.
고려 시대 유적은 하송리 대장계사지, 창녕사지, 금마리사지, 서산사지 등의 불교 유적이 있으며, 고분 유적으로는 고려 시대 민묘로 북면 공기리 4곳, 주천면 주천리 2곳, 영월읍 삼옥리 1곳이 확인되었다.
조선 시대 유적은 법흥 하수종말처리장 건설부지 내 유적 발굴 조사에서 원형에 가까운 삼가마 3기와 함께 소량의 기와편과 자기편이 출토된 바 있다. 불교 유적으로는 보덕사와 금몽암 등의 사찰이 있으며, 사지(寺址)로는 대승암, 석대암, 은신암, 영은암 등이 남아 있다. 유교 유적으로는 단종과 관련이 있는 장릉, 창절서원, 영모전, 민충사 등이 있으며, 영월읍 영흥리에는 영월향교가 남아 있다.
이처럼 영월은 구석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유물과 유적지가 조사되고 있어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역사적 관계 규명에 필요한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를 제시하여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