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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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權回復運動 |
영어공식명칭 | National Rights Recovery Movement |
이칭/별칭 | 국권수호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강점기 영덕 지역에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전개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
[개설]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지역의 국권회복운동은 크게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구분된다. 의병운동을 전개한 조직으로는 영해의진(寧海義陣)·영덕의진(盈德義陣)·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영릉의진(寧陵義陣)이 있으며, 애국계몽운동은 주로 신교육구국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영덕 지역의 국권회복운동은 1871년 영해에서 일어난 이필제(李弼濟)의 난[영해농민의 난], 1881년 위정척사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영남만인소 등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영덕 지역은 개항 이후 이른 시기부터 일본 어민들의 침투가 이루어진 곳이다. 특히 1904년 러일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영덕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일대가 러시아와 일본의 전장터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위기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경과]
1. 의병운동
영덕 지역 의병운동은 전기 의병과 후기 의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 의병은 1896년 1월 22일 조직된 영해의진과 같은 해 3월 조직된 영덕의진의 활동이 주목된다. 또한 경기도 이천에서 창의한 이천수창의대진소(利川首倡義大陣所)의 창의장 김하락의 의진이 영덕에서 활동하였다.
영덕의 후기 의병은 의병장 신돌석(申乭石)이 결성한 영릉의진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경상북도 동해안과 북부 산간 지대에서 불굴의 항전을 전개하였다. 신돌석 피살 이후에는 그 휘하에서 활동하던 정문칠(鄭文七)·오두환(吳斗煥) 등이 의병전쟁을 지속시켜 나갔다.
2. 애국계몽운동
영덕 지역 애국계몽운동은 신교육구국운동이 주축을 이룬다. 신교육구국운동은 사립학교 설립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1908년 남정면의 장사학교(長沙學校), 1909년 3월경 설립한 병곡면의 영동학교(寧東學校), 1909년 5월 축산면의 위산학교(爲山學校), 1910년 6월 영해 출신 남세혁이 설립한 협창학교(協昌學校), 1910년 병곡면의 송천동 안동 권씨 문중이 설립한 대제학교(大濟學校) 등이 영덕 지역에 설립되었는데, 이들 사립학교는 신문화의 수용과 민중의 지식 개발을 교육 이념으로 내세웠다.
한편, 1908년 3월 서울에서 영남 인사들이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를 설립하여 신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영덕 지역에서는 영해 출신 권영조(權英祚)가 교남교육회에서 활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영덕 지역의 국권회복운동은 개항 이후 전개된 외세의 침략, 특히 일제의 정치·경제적 침략에 대한 위기 의식의 발로였다. 우선 의병운동의 경우 전기 의병이 보수 유림 주도의 위정척사적 대응이었다면, 후기 의병은 광범위한 민중 세력이 동원된 민족 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후기 의병은 러일전쟁 이후 확산된 동해안 일대 일본인 어민의 경제적 침투가 주요 투쟁 목표가 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신교육구국운동에서 주목할 것은 이들의 활동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남세혁은 당시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이끌었던 이상룡(李相龍)의 영향으로 협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던 권영조는 대제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1911년 남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김대락(金大洛)·박경종(朴慶鍾) 등과 함께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나아가 이들의 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의 기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