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21
한자 朝鮮時代
영어공식명칭 The Joseon Dynasty Period
이칭/별칭 이조 시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병훈

[정의]

1392년 조선 개창부터 1876년 개항 이전까지 경상북도 영덕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 영덕·영해 지역은 해안에 자리하였으므로 해산물과 제염(製鹽)이 성행하여 영남 북부 내륙지방의 어염물(魚鹽物) 공급처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해로(海路)를 통한 함경도, 강원도 지역의 조세 곡물을 운반하는 경유지로 그 경제적인 효과도 컸다. 반면 일찍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았기에 동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다. 이러한 경제·교통·군사적 중요성으로 오래전부터 육지에는 포성(蒲城), 달로산성(達老山城), 오보성, 마고산성, 읍성(邑城), 현성(縣城) 등의 성을 쌓아 지역을 요새화하고, 바닷가에는 오포성과 축산성을 쌓아 오포수군진과 축산포수군진을 설치하여 외적을 방비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영덕·영해 지역이 연안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재지사족의 성장과 그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사회·정치·문화적인 측면에서 영남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행정구역의 변천]

1414년(태종 14)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영해는 1413년(태종 13) 도호부사영(都護府使營)을 두고 종3품의 문관을 도호부사(都護府使)로 임명하였다. 영덕은 1415년(태종 15) 바닷가에 있다고 하여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가, 1466년(세조 12)에 종5품의 현령(縣令)을 두었다. 또한, 고려 이래로의 속현과 향소부곡도 정비되었다. 이때 영해부에는 영양(英陽)과 청기(靑杞)의 속현과 석보와 수비부곡이 남게 되었다.

영양현의 복설은 1641년(인조 19)에 이미 진정이 있었지만 논의가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664년(현종 5)에 조암(趙顉) 등이 재차 상소하고, 1675년(숙종 1)에는 조책(趙頙)이 거듭 상소하면서 왕명으로 복설이 결정되었다. 그 결과 1675년 9월에 초대 현감으로 조사문(趙嗣文)이 임명되었다. 이에 반발한 영해유생 이희일(李希榏) 등은 12월에 복설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기각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에 복현소를 올렸던 조책이 유생을 사칭하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복설이 취소되었다. 이후 영양 유생들의 복설운동과 대사성 홍우원(洪宇遠)의 상소로 1677년(숙종 3) 진보현으로 이속(移屬)시켰다.

이후 1681년(숙종 7)에는 영양 유생 남시직(南時稷) 등 100여 명이 영양현의 독립을 요구하는 상소를 거듭 올려 마침내 재가를 받았다. 그 결과 1683년(숙종 9) 1월 영양현감으로 이선악(李宣岳)이 내려오면서 독립현이 되었다. 당시 석보와 청기는 1682년(숙종 8) 1월 15일 영해의 주헌문(朱憲文) 등이 상소하여 영해부에 다시 소속되어 있다가 1906년 영양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청기현은 기록이 없어 언제 독립되어 갔는지 알 수 없다. 조선 전기에 이루어진 영해부영덕현의 체제는 영해군과 영덕군으로 각각 변경되는 1895년까지 아무런 변동 없이 그대로 존속되어 왔다.

[인구와 경제]

1. 인구의 변화

조선 전기 영덕과 영해는 읍격에 비하여 호구(戶口) 수는 큰 차이가 없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영덕의 호구 수는 286호, 인구는 남정(男丁)을 기준으로 1,110명이며, 영해는 215호, 1,538명이었다. 그러나 영해의 속현인 영양현의 40호, 481명과 청기현의 29호, 224명을 합하면 284호, 2,243명으로 2배 정도 남정의 수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영덕과 영해의 호구 수는 점차 증가하여서 1789년(정조 13)의 『호구총수(戶口總數)』를 보면 영덕 3,630호, 15,020명, 영해 2,466호, 8,488명으로 확인된다. 비록 호구의 환산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3배 이상 증가하였다. 특히 영덕이 영해에 비하여 2배가량 인구가 많았다. 이것은 1874년(고종 10)의 『영남읍지(嶺南邑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읍격이 낮은 영덕이 영해보다 호구 수가 많은 것은 외부에서 유입된 인구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4년 영해가 영덕에 편입된 것은 이처럼 영덕의 규모가 더 컸던 것도 한 요인이다. 실제 『교남지(嶠南誌)』를 보더라도 영덕은 18개의 성씨가 확인되고, 영해는 22개의 성씨가 확인되는데, 조선 전기의 토성과 속성을 제외하면 각각 10개와 9개의 성씨가 증가하였다. 즉 영덕·영해 지역에 그만큼 다양한 호구가 유입되었음을 나타낸다.

한편, 고려 후기 이후 토성(土姓)으로서 재지사족 가문으로 성장하거나, 영덕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현재까지 세거하고 있는 주요 가문으로는 대흥백씨(大興白氏)·무안박씨(務安朴氏)·선산김씨(善山金氏)·수안김씨(遂安金氏)·안동권씨(安東權氏)·야성김씨(野城金氏)·야성정씨(野城鄭氏)·영양남씨(英陽南氏)·영천이씨(永川李氏)·영해박씨(寧海朴氏)·재령이씨(載寧李氏)·진성이씨(眞城李氏)·파평윤씨(坡平尹氏)·평산신씨(平山申氏)·함양박씨(咸陽朴氏) 등이 있다.

2. 전결의 변화와 장시의 개설

영해와 영덕은 동쪽으로는 바다를 접하고, 서쪽으로는 높은 산으로 막혀 있어서 수전(水田)을 개간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농사를 짓기 어렵다 보니 조선 전기와 후기의 농지에는 큰 변화가 없다. 조선 전기 영덕에는 1,246결의 전결이 확인되며, 영해에는 2,246결이 있었다. 그러나 1832년의 『경상도읍지』에는 영덕에 약 2,100결이 장부에 기재되었지만 실제로는 약 1,368결로 파악되고 있다. 영해에서는 약 1,993결 중 실제 약 1,218결만이 있었다.

수치로만 본다면 영덕의 전결은 조선 전기 이래로 조금 증가했지만, 영해는 오히려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농경지의 축소는 인구의 감소로도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비슷한 시기에 확인되는 영덕과 영해의 호구 수를 보더라도 영덕이 더욱 많았다. 인구의 증가량에 비하여 농경지의 규모는 그대로였기에 영덕 백성들의 부담이 그만큼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유동인구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필연적으로 농업 이외에 어업과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는 대토지 소유자에 의한 상업적 농업이 시작되고, 전업적 수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교환하기 위한 상행위의 필요성이 높아져 갔다. 따라서 이들 생산품을 교환 또는 매매하기 위한 유통조직의 필요성이 점증하였다. 이러한 유통조직을 대표하는 것이 시장인데, 후기에 들어와서 이러한 시장의 개설이 전국 각지에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832년의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장시조에 의하면, 영덕은 읍내장·식율장·장사장, 영해는 부시(府市)·석보시 등이 확인된다.

그러나 1935년의 『영영승람(盈寧勝覽)』에는 영덕에 지품장·강구장이 추가되었다. 이것은 개항 이후 강구항을 중심으로 해산물 교역이 증가하고, 지품·신안을 중심으로 농·임산물의 교역이 증대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반면 영해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기존의 부시가 영해시로 변경되고, 석보가 영양으로 이전되면서 병곡장이 새롭게 개설되었지만 장시의 수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영해장은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거래 규모가 큰 시장으로 영천·울진·영양·진보·안동에서도 상인들이 왔다.

[교육 기관의 변화]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초학교육을 담당하였던 서당(書堂)에서부터 관례(冠禮)를 치르고 학문을 심화하는 단계로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서당에 대한 기록은 남은 것이 없어서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은 건국 이래로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 아래 각 군현에 유학의 확산과 향풍의 교화를 위해 국학(國學)인 향교를 건립하였다. 영덕에는 영덕향교(盈德鄕校)영해향교(寧海鄕校)가 있었다. 영해향교는 1346년(충목왕 2) 작지산 아래에 세워진 영해부 소학(小學)에서 연원한다. 1529년(중종 24) 부사 공서린(孔瑞麟)이 현재[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564~1572년 사이 태화루(太和樓)가 건립되고, 수차례 개수와 중수가 이어지다가 1706년(숙종 45)에 대규모 중건이 있었다. 영덕향교는 1403년(태종 3)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남은 자료가 없어서 내력을 파악하기 어렵다.

쇠퇴한 국학을 대처하여 사림의 강학·장수처(藏修處)로 만들어진 서원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사학(私學)이었다. 영덕현에는 1568년(선조 1) 남강서원(南江書院)이 건립되어 이언적과 이황을 제향하였다. 1628년(인조 6)에는 신안서원(新安書院)이 건립되었다. 영해부에는 1608년(선조 41) 우탁을 제향하는 단산서원(丹山書院)이 건립되고, 1665년(현종 6)에는 구봉서원(九峯書院)[박의장], 1696년(숙종 22) 인산서원(仁山書院)[이휘일·이현일], 1812년(순조 12) 운산서원(雲山書院)[백문보·백현룡], 1824년(순조 24) 운계서원(雲溪書院)[박제상·박세통·박응천], 1847년(헌종 13) 대봉서원(大峯書院)[권자신·권책·권상길], 1848년(헌종 14) 인계서원(仁溪書院)[송시열]이 건립되었다. 이들 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모두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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