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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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영어공식명칭 | Contemporary Tim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허종 |
[정의]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영덕군의 역사.
[정치]
경상북도 영덕군은 광복 이후부터 6.25전쟁까지 분단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커다란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해방 직후 영덕면을 포함한 각지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 기관으로 치안유지회와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미군 진주 후에는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미군이 영덕을 완전 장악하기 전까지 자치 기구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좌우 세력이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지향이 달라 날카롭게 대립하였지만, 영덕에서는 1946년 4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덕군지부가 결성될 정도로 우파 세력의 기반이 약해 좌우 세력의 대립은 미미한 양상이었다.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며 발발한 1946년 ‘10월 항쟁’은 좌우 세력의 정치 지형에 변화를 주었다. 영덕 지역에서는 달산면을 중심으로 일부 지역에서 발발하였으며, 10월 항쟁 과정에서 좌우 세력 사이에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좌우 세력의 대립이 날카로워졌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동청년단의 오택렬(吳宅烈)이 무투표로 당선되는 등 우파 중심의 정치 지형이 형성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험준한 산악 지형을 중심으로 좌익 무장 유격대[빨치산]가 활동하였다. 좌익 무장 유격대의 활동, 군과 경찰의 진압 작전으로 많은 인명이 피해를 보았다.
1950년 6.25전쟁 중 국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7월 초부터 중순까지 군과 경찰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원이 집단 학살되었다. 7월 16일 북한군이 영덕을 점령한 후에는 좌익 세력이 우익 성향의 인사를 학살하였다. 북한군 점령 시기 영덕 주민들은 의용군으로 끌려가거나 노무자로 동원되어 희생되었다. 당시 영덕은 미군의 함포 사격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으며, 많은 주민이 희생되었다. 이어서 '영덕-강구' 전투, '영덕-포항'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9월에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북한군의 병력 분산과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장사상륙작전’이 실시되었다. 9월 23일 국군이 청하를 탈환하고, 9월 24일 영덕을 완전 탈환하였다. 국군이 수복한 후에는 북한군에 협력한 부역자 처벌로 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었다.
제1공화국 시기 영덕 주민의 정치의식은 보수 성향을 띠었으며, 1960년대 이후부터 치러진 각종 선거에서도 보수적인 정치의식을 보였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18년 동안의 박정희 정권 시기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 후보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맞이한 민주화 이후부터 현재까지 치러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수 정당 또는 보수 후보에게 높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
[행정]
영덕군은 동쪽은 동해, 서쪽은 경상북도 영양군과 청송군, 남쪽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쪽은 경상북도 울진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1963년 축산면 축산출장소가, 1974년 지품면 원전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9년 5월에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영일군 죽장면 하옥리 일부가 달산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동(洞)을 리(里)로 개칭하였으며, 1989년 지품면 오천리 일부를 분리해 신애리를 신설하였다. 1990년 강구면 하직리를 원직리로, 병곡면 휘리를 덕천리로 개칭하였으며, 1993년 축산면 화천리가 영덕읍 화천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1995년 영덕읍 덕곡리가 덕곡1리, 2리로 분리되고, 영해면 성내1리가 성내1리, 5리로 분리되었다. 현재 1읍[영덕읍] 8면[창수면·병곡면·영해면·축산면·지품면·달산면·강구면·남정면]으로 행정리가 204개, 자연부락이 325개이다. 군청은 영덕읍 남석리에 있다.
영덕군은 전형적인 농촌 지역과 어촌 지역으로 산업화 과정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1966년 11만 9천여 명을 정점으로 1970년 11만 2천여 명으로 감소하였다. 1970년대에는 산업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는 이농(離農) 현상으로 1980년 9만 1천여 명으로 감소하였으며, 특히 1985년 7만 7천여 명으로 대폭 감소하였다. 1990년 6만 5천여 명, 1995년 5만 1천여 명, 2000년 4만 4천여 명, 2010년 3만 6천여 명으로 꾸준히 감소하였다. 2013년 4만여 명으로 일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였으나, 2021년 9월 행정안전부 인구통계 자료로 현재 인구는 1만 9천여 가구에 3만 5천여 명이다. 군청 소재지인 영덕읍에 1만여 명이 거주하여 가장 많으며 영해면·강구면·병곡면·축산면·남정면·지품면·창수면·달산면 순으로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경제·교육]
영덕군의 총면적은 2018년 『통계연보』 기준 741㎢이다. 경지 면적은 5,600㏊이며, 경지 면적 가운데 논이 2,900㏊, 밭이 2,600㏊이다. 농업 인구는 4,300여 가구에 8,300여 명이다. 농가 소득은 사과·포도 등의 과실류, 고추, 가을배추 등의 엽채류[葉菜類], 벼·맥류, 닭·한우·양봉 등의 축산물 순이다. 특히 영덕 송이버섯은 2020년 현재 전국 생산량의 약 15.5%를 차지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은 생산량을 보이고 있다.
1996년 영덕읍 남산리 일대에 제1농공단지가 조성되었으며, 2019년 영덕읍 매정리 일대에 제2농공단지가 조성되었다. 농공단지에 입주한 업체는 비금속 광물 제품 제조업이 중심이며, 금속 가공 제품 제조업, 기계 및 장비 제조업, 전기 제품 제조업, 식료품 제조업 공장이 입주해 있다. 현재 교육 기관으로는 분교를 포함한 초등학교 11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